교회와 선교기관,그리고 선교사는 선교사명의 수행에 있어서 삼위일체의 관계라고 볼 수 있다. 교회와 선교전문기관의 관계를 배타적 내지는 심지어 대립의 관계로 놓고 보려고 하는 입장들이 간혹 있는데. 이는 하나님 나라의 다양하고도 역동적인 선교의 성격을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데에서 오는 오류라고 볼 수 있다.
교회와 선교전문단체와의 관계는 협력이라고 하는 패러다임(Paradigm)에서 그 온전한 기능들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교회 뿐만 아니라 선교전문단체 역시 선교 수행에 있어서 하나님이 친히 선교역사 속에서 사용하여 오셨고 오늘도 하나님의 교회의 확장을 위하여 필요에 따라 사용하고 계심을 볼 수 있다. 따라서 본 소고에서는 교회와 선교단체와의 관계를 간략히 성경적으로 살펴보고 주로 교회와 선교단체들이 어떻게 협력하여 상호 보완함으로써 하나님의 선교를 효과적으로 수종들 것인가에
대하여 고찰하여 보고자 한다.
1. 선교사명의 주체는 교회이다
교회는 사도들의 가르침의 터 위에 세워졌으며 사도들에게 주어진 사명이 교회를 통하여 수행되므로 교회는 사도적인 성격을 갖는다. 따라서 교회가 선교사명의 주체인 것도 교회가 사도들의 선교의 사명을 계승하기 때문이다.
선교의 대 위임 명령은 일차적으로는 사도들에게 직접적으로 주어진 것임을 성경에서 볼 수 있다. 선교의 사명은 사도들이 주님으로부터 직접 받았다. 복음서에서 주님은 당신의 제자들에게 모든 천국의 비밀들을 계시하시고 그 의미들을 풀어 주시며 땅끝으로 이르러 당신의 증인이 될 것을 미리 말씀하여 주셨다. 그러나 사도들이 받은 사명은 사도들만이 받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영구적인 것이다. 마태복음 20:1 9-20에서 볼 수 있듯이 사도들에게 주어진 선교의 대위임 명령은 시간적으로는
“세상 끝날 까지”의 임기인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사도들에게 직접적으로 주어진 선교의 대위임 명령이 사도들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여 준다.
이 사명은 사도들이 세우게 될 사도적 교회에 주어지는 사명인 것이다. 즉 그들의 사명을 계승한 교회에 주어진 것으로서 영구적임을 우리는 알 수 있다. 다음의 성경구절들은 이러한 교회의 사도적 주체성을 잘 설명하여 주고 있다.
(1) 에베소서 2: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믿는 신자 개개인은 구원에 관한 한 예수 그리스도께 직접 관계한다.
다시 말하면 구원은 예수께서 친히 이루시는 사역이다. 구원을 베푸는 주체는 오직 하나님 뿐인 것이다. 그 누구도 구원을 대신 가져다주지는 못한다. 구원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사역”이라고 하는 차원에서 볼 때에 구원이 이루어지는 데에는 그 순서가 있는 것을 본다. 하나님 아버지는 그 아들에게 사명을 주셔서 이 땅에 보내셨고 그 아들 예수께서는 사도들에게 또한 사명을 주셔서 보내셨다.
사도들이 주님께로부터 받은 이 사명은 또한 교회를 통하여 세상 끝날 까지 계속된다. 이 사명은 또한 교회를 통하여 세상 끝날까지 계속된다. 이 사명의 계승이 선교(Mission)인 것이다. 엡 2:20은 이러한 사역의 계승되는 순위를 말하여 주고 있다.
(2) 빌립보서 2:25, 고린도후서 8:23
“그러나 에바브로디도를 너희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노니 그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된 자요 너희 사자로 나의 쓸 것을 돕는 자라”, “디도로 말하면 나의 동무요 너희를 위한 나의 동역자요 우리 형제들로 말하면 여러 교회의 하자들이요 그리스도의 영광이니라.” 여기서 “너희 사자” 또는 “교회의 사자”라는 구절이 나오는 “사자”라는 단어는 원어상 “사도(apastolos)”라는 말로서 사명을 갖고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이다.
예수님 역시 하나님의 사도로 묘사되고 있다.(히 3:1) 따라서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사도시요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이며 에바브로디도나 “우리 형제들”은 교회의 사도들인 것이다. 특별히 위의 빌 2:25와 고후 8:23의 내용을 보면 이들이 교회의 파송을 받은 “교회의 사자들”임을 알 수 있고 이것은 당시에 교회가 파송권이 있었다는 사실을 잘 뒷받침하여 준다.
(3) 마태복음 28:19-20
이미 앞에서 언급한대로 선교의 대위임 명령은 사도들에게 직접 주어졌지만 그 내용은 이 사명이 사도들의 사역을 계승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 주어졌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교회는 선교의 대사령관에 의하여 세상에 보냄을 받았고 보냄을 받은 교회는 그 증거대로 끊임없이 교회의 사자들을 온 세상을 향하여 보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교회론적으로 볼 때에도 주 예수의 교회(제자들)을 세우기 위하여 말씀을 가르치시고 세례를 주는 사역은 교회의 본질적인 사역이므로 선교를
포함하지 않은 교회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2. 선교전문기관은 성경적이다.
위에서 살펴본 대로 교회는 선교의 주체가 된다. 교회의 존재 이유 및 목적 역시 세상에 보냄을 받은 “사도성”에 기초하고 있다. 그러나 교회가 파송의 주체가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다른 문화권에서의 실제적인 사역을 고려할 때에 교회는 선교의 전문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타문화권 선교라고 하는 특수한 상황을 단일 문화권에 살고 있는 교회가 실제에 있어서 효과적으로 다 다룰 수는 없기 때문이다. 선교는 아주 특수한 전문사역이다. 따라서 교회가 선교의 대사명을 실천함에 있어서
교회는 선교의 전문적인 사역을 수행하기 위하여 전문기관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교회가 선교사명의 계승자인 고로 선교수행을 위한 교회의 전문기관이 필요하지 않는 것이 아니냐 하는 질문을 종종 받게 된다. 이러한 기관은 과연 성경적인가 하는 질문도 하는 것을 본다. 여기에 대하여 찬반론이 있는 것을 보면서 1) 필자는 목회자로서 또 선교기관의 실무자로서 양면을 다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필자는 목회자로서 또 전문선교기관의 실무자로서 양면을 다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필자는 교회가 선교의 주체임을 견지하면서 동시에 선교사역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하여
선교전문기관이 필요하다고 믿는데 여기에는 다음의 몇 가지 성경적인 원리를 들 수 있다.
(1) 위임의 원리와 일치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당신의 권한을 위임하셨고(마 10:1, 막 3:13-15) 제자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그 권한을 위임하셨다.(행 6:6) 구약에서도 모세는 그 재판권을 맡길만한 여러 사람들에게 위임하여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을 수행하였던 것을 본다. 교회는 교회에 맡겨진 사명을 효과있게 수행하기 위하여 선교전문기관에게 그 권한을 위임할 수 있다.
그러나 교회의 이러한 위임이 교회의 교회됨을 포기하거나 전문기관이 교회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교회의 위임을 받은 선교전문기관은 교회의 선교를 완수하기 위하여 특별한 역할을 갖는 특수기관인 것이다.
(2) 선별의 원리와 일치
인류가 하나님께 불순종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택하여 세상을 축복하시었다. 이스라엘의 왕과 제사장들과 백성이 다 타락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실패하였을 때에도 하나님은 그들을 그대로 두지 않으시고 선지자들을 일으키셨다.
이스라엘이 자신의 참 신분을 잊고 어두움 가운데 깊은 수면에 빠져 있을 때에도 하나님은 제도권으로부터 세례 요한을 일으키셨다. 그 후 하나님은 계속하여 교회를 일으키셨고 교회가 또 역사 속에서 그 본연의 사명을 잊고 말씀과 어긋난 가르침을 줄 때에도 교회 안의 개개인의 성도를 일으키셨다. 루터, 칼빈, 낙스, 웨슬리 등이 다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사람들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교회가 선교의 사명에 둔해 있을 때에 하나님은 윌리엄 캐리, 허드슨 테일러 등을 일으키셔서 이방에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도록 하셨다. 윌리엄 캐리 이후의 서구 선교는 수많은 선교단체들의 선교락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교회보다는 선교단체들이 일어나 이방의 선교를 감당하였던 것을 볼 수 있다. 근세 선교역사의 초창기에는 성령의 감화를 받고 말씀에 사로잡혔던 소수의 신앙인들에 의하여 선교의 열기가 불붙었던 것을 우리는 선교의 역사를 통하여 볼 수 있다. 이들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말씀에 순종함으로서 많은 열매를 맺는 축복을 경험하였다.
이와 같이 선교기관은 하나님의 주권적이며 선별적인 역사에 근거를 둔다고 볼 수 있다. 구약 시대에서도 제사장들을 중심으로 한 제도권이 본연의 신분과 사명을 잊고 있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항상 선지자들을 일으키셔서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시고 또 부여하신 축복과 사명을 이루어 가셨던 것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오늘날에도 교회가 본분을 잊을 때에는 당신의 백성들을 소수라도 일으키시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 후자가 선교전문기관으로 나타나는 것을 선교역사 속에서 종종 보는 것이다.
(3) 효율성의 원리와 일치
사도행전 6장에서는 사도들이 사역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하여 구제하는 일에 전념할 수 있는 일꾼들을 택하였던 것을 본다. 사도행전 13장에서도 우리가 일반적으로 잘 알고 있듯이 안디옥교회는 사울과 바나바를 이방선교의 특수사명을 위하여 “따로” 세워서 보내었다. 따로 세움을 받았던 이들은 그 구별된 목적대로 사명의 특수성을 잘 지켜 나갔고 그 결과 이방에 효과적으로 교회들이 세워졌던 것을 우리는 성경에서 볼 수 있다.
교회는 역사를 거듭하면서 세계선교가 단순하지 않음을 계속 체험하고 있다. 단일민족문화권(monoculturalistic area)에 살고 있는 교회가 다른 문화권에 대하여 항상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지역교회는 자신이 처하여 있는 교회가 다른 문화권 이상을 넘어가기가 쉽지 않다. 그러므로 교회가 자기와 다른 문화권에서 살고 있는 이질문화의 사람들에게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달하기 위하여서는 교차문화권적인 시각(a cross-cultural perspective)을 가진 전문적인 사역자와 기관을
양성하여 그들에게 교회의 이 중차대한 사역을 맡겨야 한다. 그러므로 선교전문기관은 교회와 대립되는 또 하나의 다른 모체가 아니라 선교의 효과를 증대하기 위한 문자 그대로 선교전문기관이 되는 것이다.
특별히 선교역사를 들여다보면 선교를 수행하는 선교사들이 다른 민족들에게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달하기 위하여 타종교 및 문화권에 대하여 진지하게 살피고 분석하여야 할 필요들을 많이 느껴왔던 것을 볼 수 있다. 이를 위하여 오늘날은 특별히 20세기 후반에는 세계의 부족들과 언어들 및 종교, 문화 등을 철저히 연구하는 기관들이 많이 탄생하였다. 이들은 복음전달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하여 타문화권 선교에 필요한 철저한 준비들을 전문적으로 하는 기관들이다. 특별히 한국 및 미주에
있는 한인교회들도 이러한 선교의 전문성이 눈을 차츰 뜨고 있으며 선교효과의 중대를 추구하고 있는 모습은 무척 고무적인 일이라 생각된다. 교회가 다 할 수 없는 선교의 특수한 부분들을 선교단체들이 맡아서 전문성을 갖고 현지사역에 충실하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4) 협동의 원리와 일치
한 교회나 몇몇 교회의 힘으로 선교의 사명을 다 감당할 수 없음은 명약관화한 일이다. 협동 또는 협력은 하나님 나라 건설에 있어서 가장 본질적이며 필수적인 요소 중의 하나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된 모든 교회들과 그 구성원인 지체들이 그리스도의 나라를 전파하는 선교의 사역에 있어서 하나됨을 표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며 이것은 선교의 협력을 통하여 표현된다고 말할 수 있다.2) 한 교회 혹은 교단이 다 할 수 없는 일들을 같은 신앙고백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이 모여서 함께
동역하게 될 때에 사역의 효과가 증진되어지는 것은 말할 여지도 없는 것이다. 선교단체는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에 교회간의 협력을 유도할 뿐만 아니라 분산되어 있는 선교인력과 모든 자원들을 하나로 모아 타문화권 선교에 있어서 최대의 효과를 꾀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전략적인 본부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다.3)
3. 협력방안
앞에서 필자는 간단하게나마 선교단체의 존재 의미와 그와 관계된 성경적인 원리들을 살펴보았다. 이제 본 항목에서는 다시 간략히 교회와 교회의 위임을 받은 선교단체와의 협력의 방안들에 관하여 고찰해 보고자 한다.
(1) 상호존중
선교는 하나님 나라의 건설이다. 그러므로 이미 앞에서 지적한 대로 형제애에 근거한 협력은 선교의 필수적인 요소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보내실 때에도 그분은 제자들을 둘씩 짝을 지어 보내셨던 것을 볼 수 있다. 성령께서 안디옥교회에서 선교사를 내보내실 때에도 사울이나 바나바를 각각 따로 내보내시지 않고 함께 가도록 하셨다. 이러한 협력을 모색하기 위하여 우리는 상호존중하는 겸비한 자세를 가져야 한다. 성경은 우리를 향하여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을 것을 말씀하고 있다.(마
28:29, 빌 2:5) 시편 133:1에서 다윗은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라고 노래하고 있는데 이 시는 다윗의 한을 토로하고 있다고 보인다. 다윗의 많은 아들딸들은 함께 연합하여 살지 못하고 서로 형제끼리 욕을 보이면서 심지어 죽이기까지 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서로 왕이 되고자 친 혈육을 배역하기도 하였는데 다윗은 자기 자녀들의 이러한 모습들을 보면서 형제의 연합이야말로 하나님의 사람들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임을 고백하게 되었다고 보인다.
오늘날도 가만히 선교현장을 들여다보면 다윗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몇몇 어떤 선교사들의 경우를 보면 이분들이 과연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위하여 선교지에 온 것인가를 의심하게 될 때가 종종 있다. 이러한 의심을 할 정도로 선교사들이 심각하게 자신들만의 왕국을 만드는 경우를 필자는 종종 보아왔다. 이분들은 다른 단체의 접근을 불허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다른 단체들을 공공연히 낮추거나 무책임한 비판을 서슴없이 하는 때가 많다.
선교부 운영도 세속의 기업의 운영과도 비슷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따라서 한국교회는 선교의 제반에 걸쳐서 소위 “교통정리”를 해야 한다는 교회 내의 자성의 소리가 높아진지 꽤 오래된 것이다.4) 이제 선교의 근본원리를 쫓아 상호를 존중하는 협력을 회복하여야 하는 것이다.
또 하나 생각할 것은 선교를 수행함에 있어서 자연히 따르게 되는 문화의 차이와 각 단체들의 상이점들이다. 우리는 예수 안에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한 몸을 이루고 있음을 안다. 그런데 교회(교단)가 다른 선교단체와 협력할 때에 그 단체가 어느 정도 이질적인 문화를 갖고 있을 경우가 있다. 이러한 경우에는 문화적 차이들을 인식하고 문화간의 “황금률(Cultural Golden Rule)”, 즉 자신의 문화가 존중받기를 원하는 만큼 상대방의 문화를 존중하고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을 견지하기만
한다면 아주 훌륭한 협력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결과는 한 주님의 이름으로 세워지는 교회의 탄생일 것이다.
(2) 상호신뢰
지금 한국교회는 전 세계에 약 4,000명이 넘는 선교사를 보내고 있다. 그런데 이 많은 선교사들 중 선교사역에 있어서 연합하여 사역하는 분들은 극히 적은 것 같다. 대개 파송교회나 교단, 혹은 선교단체별로 독단적인 선교부를 조직하여 신학교나 의료기관 또는 봉사기관 등을 운영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많은 경우에 이 기관들은 타 기관들과 협력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같은 선교의 목적을 가진 기관들끼리 서로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특히 교회들이 개교회 선교를
선호할 경우 이러한 현상은 급증하는 것 같다.
같은 선교지역에서 선교전문기관을 중심으로 유사한 사역들을 하나로 모아서 선교사들이 힘을 합치기보다는 파송한 각 교회의 명분 때문에 선교사들이 각개전투를 하게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이러한 경우에 현지에서 하나되지 못하는 선교사들의 모습은 현지인들 눈에도 쉽게 띄는 것이다.5) 성숙한 선교는 상호존중 내지는 신뢰를 통한 상호협력하는 선교이다.
선교의 독불장군 내지 영웅시대는 이제 지나갔다. 교회들이 선교단체들을 중심하여 현지에서 선교사들이 협력할 수 있도록 그러한 협력의 장을 마련하여 주고 독려하여 주어야 하는 것이다. 비생산적인 교회간의 경쟁, 비효율적이고도 낭비적인 사역의 중복 등이 시정되기 위하여 교회는 선교현장에 있는 선교전문기관과 아주 밀접한 관계와 협력을 모색하여야 한다. 서로 믿어 줄 수 있어야 하며 이러한 신뢰를 바탕으로 할 때에 선교현지에서 그동안 많이 볼 수 있었던 인력 및 재력 낭비를 줄
수 있으며 선교부들이 주도권을 놓고 갖게 되는 인간적인 갈등과 이해 등을 해소할 수 있을 것이다.
(3) 일관성 유지
보수교회 지도자는 교회만이 하나님이 세우신 유일한 기관이요 선교단체는 교회의 시녀 및 종으로 생각한다. 즉 교회는 하나님이 쓰시는 기관이요 선교단체는 교회의 시녀로 생각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교회만이 참 선교기관이고 선교단체는 곧 없어져야 한다는 것이 된다. 교회나 선교단체는 다 같이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복음과 선교를 위한 기구이다. 고로 교회이든 선교단체이든 인간 구원을 위한 복음전파에는 하나의 신학이다.
교회는 양육과 제자 삼는 전문성이 있다. 선교단체는 선교단체별로 정보, 문화, 전문성이 있다. 고로 양자의 특색을 인정하고 전문성에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4) 충실한 봉사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할 일은 충실한 봉사이다.
각주
1) 이에 대한 견해는 Fuller의 Van Engen 교수의 이론과 William Carey 대학의 Winter 교수의 견해를 비교하여 보면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Van Engen 교수는 교회가 선교의 주체임을 강조하는 반면에 Winter 교수는 선교전문기관이 주축이 되어 선교를 수행하여야 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2) 이것은 알라에게의 복종을 외치는 이슬람권에서는 더욱이 필요한 부분인 듯하다. 그들은 이슬람 공동체인 “움마(umma)”를 자랑한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들이 참으로 협력하고 섬기는 모습은 하나의 중요한 선교전략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3) 교단 내의 신학교가 잘 운영되는 것은 여러 교회가 한 목적을 가지고 서로 협력하기 때문이다. 선교단체 역시 이러한 신학교와 같은 차원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선교단체는 교회의 거룩한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특별히 따로 세워진 협력단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4) 이 “교통정리”라는 개념에 덧붙여 생각하여 볼 것은 선교신학의 일치를 추구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선교신학이 성경적으로 잘 정립되어 있는가 하는 것이다.
선교사들 분만 아니라 선교를 수행하는 교회 및 전문기관들이 선교의 외적 기능들은 많이 추구하고 또 갖고 있지만 선교의 근본적인 선교신학, 즉 동기와 목적과 선교방법에 대하여 얼마나 성경본문(text)과 선교현장(context)을 잘 연결하고 조화롭게 통합(integration)시키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선교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이것은 선교의 동기요 동시에 목적이 된다.
하나님의 영광만이 선교의 핵심이 될 때에 영혼구원은 가장 순수한 차원에서 이루어진다고 본다. 이 “하나님의 영광”과 “순수한 구령의 열정”이야말로 선교를 수행함에 있어서 최고의 동력이 되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선교를 수행하는 자들은 자신을 부인하는 것이다.
자신의 영광과 또 마음 깊은 곳에 혹시라도 숨어있을지 모르는 순수하지 못한 선교의 동기 때문에 시기와 분열과 다툼이 생기는 것이다. 자기의 영광은 자기의(自己義) 내지는 자기 우월주의를 낳게 되고 이것이 부조화의 씨앗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적인 선교신학의 진정한 일치를 우리는 추구하여야 할 것이다.
5) 선교사들은 받아들이는 나라의 교회 지도자들 사이에 이미 한국 선교사들에 대한 비판의 소리가 높아지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겸허한 자세로 받아들여야 한다. 대부분의 비판의 내용을 보면 한국 선교사들끼리의 반목과 불일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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