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통일선교를 위한 대북활동은 그 성격상 사회과학적 분석(Socio-Political
Science Oriented Analysis)의 토대 위에서의 선교학적 접촉(Missiological Approach)이라는
특수성을 가지고 있다.
나의 이러한 북한사회 연구와 통일선교를 위한 대북활동은 1977년 <북한해방기도운동>을 전개하면서 시작되었다.
<북한해방기도운동>은 남한의 북한 출신 기독교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조직되어 백낙준 박사를 고문으로,
한경직 목사를 중앙위원장으로, 실행위원장에는 재향군인회 회장 김일환 장군 등 당시 50대의 중견 교회지도자들이
대거 참여한 거국적인 조직이었다. 필자는 당시 대북활동위원장과 공산권연구소장을 겸하고 이 운동을 주도하였다.
나는 이 운동을 위한 대북활동으로 인하여 1978년 박정희 대통령 사망 직전에 중앙정보부에 체포되었다가 석방된
후 후암교회 담임목사직을 사면하고 미국으로 옮겨 윌리암케리대학교에 <고려연구소>를 설립하고 본격적인
대북활동을 시작했다.
1986년에는 통일신학동지회를 조직하고, 1987년에는 재미 기독학자들과 함께 핀랜드 헬싱키에서 북한의 조국평화통일위원회와
기독교연맹 간부들과 더불어 <북과 재미동포 학자와이 대화> 모임을 가지면서 복음주의 학자 중 유일하게
재미 진보 진영 학자들과 함께 대북활동을 전개한 성직자이다.
1989년 1월 북한 방문을 시작으로 김일성 사망 이후 김정일 정권이 들어선 이후에도 2000년까지 24회에 걸쳐
북한을 방문하고 김일성 주석과 세 번에 걸쳐 독대하였으며, 빌리그래함 목사와 지미 카터 대통령의 북한 초청의 가교
역할을 하였다. 또한 북한 정권은 나를 김일성종합대학의 방문교수와 평양신학원의 방문교수로 초빙하여 강의할 수 있도록
하였다.
나는 한편 북한의 전 UN 대사를 지내고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인 한시해와 아태평화위원회 부위원장인 이종혁
등 북한 정권의 고위 대표들을 미국에 초청하여 카터 대통령과 스틸웰 전 주한 미군사령관을 만나게 하는 등 북미
관계 화해를 위해서도 활동했다. 또한 김일성 사망 직전에는 김일성과 김영삼 대통령 간의 남북정상회담을 위한 배후
교섭의 비선조직의 중심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그후 필자는 민족통일에스라운동을 조직하고 통일환경연구소장으로 지금까지 통일선교의 중심에 서있다. 따라서 이 강연은
나의 지난 1977년 이후 27년간의 북한 연구와 대북활동의 생생한 증언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반세기가 넘는 국토 분단으로 인하여 민족과 교회가 겪은 고난의 역사의 overview를
토대로 <김정일 정권 10년의 변화와 통일선교의 방향>이라는 주제를 민족의 통일을 위한 전방위 선교의
시각으로 21세기 역사 전환기에 있어서의 북의 변화와 남의 변화를 점검하면서 오늘의 주제에 대한 논의를 다음과
같은 요지로 전개하고자 한다.
먼저 우리는 1945년 제 2차 대전 종전이 가져온 국토분단과 <휴전>이라는 위장 평화 60년의 역사
속에서 김일성 정권 46년과 김정일 정권 10년을 바르게 분석하여야만 한다.
I. 한반도 분단의 역사적 분석: A HISTORICAL ANALYZE OF DIVISION OF KOREAN
PENINSULA
(1) 1945년 8월 15일: 미소 분할 점령으로 인한 국토 분단 60년
(2) 1948년 8월 15일, 9월 9일: 남북 단독정부 수립으로 인한 국가 분열 56년
(3)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 이후 1953년 7월 정전협정으로 인한 민족 분열 51년
A. 1945년 8월 당시의 남북 인구 및 교회수 비교: Comparison of
Population and Christian Forces in the North and South Korea,
August of 1945
1. 해방 당시 남북한 인구 비교
북한: 1,000만 명 / 남한: 2,000만 명
2. 해방 당시 남북한 교회 수 비교
북한: 2,500 교회 / 남한: 650 교회
3. 해방 당시 남북한 신도 수 비교
북한: 35만 명 / 남한: 12만 명
B. 북한에서의 신도 수 증가에 대한 추정:
1. 한국전쟁 시 남하한 신도 수: 50,000명
2. 북한 잔류 신도 수: 250,000명
3. 59년간 북한 인구 증가율: 150%
4. 북한 신도의 자녀 증가율: 300%
5. 추정되는 북한 신도와 그 자녀 수: 750,000명
6. 2,500 교회 중 폭격으로 파괴된 교회 수: 500 교회
7. 남은 2,000 교회 건물은 용도가 변경되어 다른 용도로 사용 중
C. 북한의 사회계층 분류:
1. 핵심계층: 정부 간부, 당원 등 당과 김일성에 충성하는 계층
2. 동요계층(기본군중): 일반 노동자, 농민
3. 적대계층(복잡군중): 월남가족, 반공조직 가담자, 종교인 ? 세밀분류: ①포섭대상, ②감시대상, ③제재대상으로
분리된다.
- 이 계층은 취업, 교육 등에서 차별 취급된다.
- ① ② 대상은 세뇌교육 대상으로 취급된다.
- ③의 제재대상은 자강도, 양강도, 함경북도 등 오지 강제수용소에 주거가 한정된다.
4. 감시조직: 지도원이라는 직책으로 세포조직을 관장하고 계속 재심사 대상을 색출한다.
5. 사회 계층 분류의 역사
1967년 통계, 1972년 통계, 1980년 통계, 1992년 통계 등을 보면 10년 전까지의 북한 사회의 변화와
추세를 측정할 수 있다.
<사회 계층 분류 통계의 역사적 변천>
(1) 1967년 통계
핵심계층: 87만 세대 391만 5천명 (27%)
동요계층: 70만 세대 315만 명 (22%)
적대계층: 173만 세대 793만 5천명 (51%)
(2) 1972년 통계
핵심계층: 30%
동요계층: 30%
적대계층: 40%
(3) 1980년 통계
핵심계층: 20%
동요계층: 50%
적대계층: 30%
(4) 1992년 통계
핵심계층: 10%
동요계층: 80%
적대계층: 10%
D. 김일성 말기의 북한의 생존 전략:
1981년 - 종교의 필요성 인정
1983년 - 성경, 찬송의 출판
1989년 - 두 교회의 복원
1990년 - 김일성종합대학 종교학과 설치
1992년 - 헌법의 수정
1992년 - 조선어사전과 백과사전 수정
1989년 - 김일성 자서전 “세기와 더불어”에서
기독교 배경 자인
1993년 - 김일성 말기 북미관계 개선 노력
1994년 - 김일성 남북정상회담 제의
1994년 7월 8일 - 김일성 사망
II. 김정일 정권 10년의 변화 과정 분석
A. 군사체제의 변화
1. 선군정치제도의 확립
김정일은 자신의 국가 수반의 지위를 <국방위원장>이라는 칭호로 바꾸었다.
(1) 이것은 <조선로동당>보다 <조선인민군>이 국가의 최고조직임을 선언한 것을 의미한다.
(2)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보다 <국방위원회>가 윗자리에 놓여졌다.
(3) 김정일은 이것을 <선군후로: 先軍後勞>라고 선언하였다.
(4) 김정일은 노동자 농민정권의 수령이 아니라 <혁명군사정권>의 최고사령관이며 단 한 사람의 <장군:
將軍>으로서 국방위원장의 자리에서 북한의 권력 구조의 핵인 것이다.
(5) 김정일 정권은 지난 10년 <선군정치: 先軍政治>라는 정치 개념을 수립하는 데 성공했다.
(6) 김정일은 김일성 사망 후 여러 차례 대규모 군 장성들의 승진 인사를 통하여 500여명의 장성에서 1,400
여명의 장성들을 만들어냈다.
(7) 이것은 남한의 400여명의 장성 수의 250%에 달한다.
2. 북한 군의 기본 지휘 통제 체제
(1) 최고사령관 = 국방위원장
(2) 인민무력부장
(3) 총참모부장
(4) 총정치국장
(5) 보위사령부장
(6) 후방총국장
(7) 예하부대장
3. 군대 내의 정치 보위와 감시 체계
(1) 정치총국: 군대 내의 조직을 사상적으로 지도 통제하는 군대의 당 권력 정치기구
(2) 보위사령부: 군대 내의 김정일 직접 지휘하의 독립적 군수사기관으로 장첩, 정보, 반혁명, 반국가 행위자
색출 처리를 전담하는 기구
4. 북한의 병역제도와 군사전략 분석
(1) 병역제도
가. 병역제도는 형식적으로는 초모사업(招募事業)으로 불리는 <지원제>이다.
나. 병역 복무 연령과 복무기간
① 고등중학교 5학년(16세)에 예비 신체검사
② 징집 연령 17세 (고등중학교 졸업 직후)
③ 복무 기간은 다음과 같이 7년에서 9년이다.
칭호 구분 진급 소요기간
(1) 전사 1년
(2) 상등병 2년
(3) 하사 1년
(4) 중사 1년
(5) 상사 1년
(6) 특무상사 2-3년
(2) 군사 전략과 전력(戰力)
가. 북한의 군사전략의 코드(code)는
고슴도치(porcupine)인가 전갈(scorpion)인가?
① “북한은 전갈 같은 놈이다. 전갈은 잘못 밟으면 쏜다. 죽어가면서도 쏜다. 그리고 또 쏜다.” -미국 태평양군
총사령관(CINCPAC)의 말이다.
② 김정일의 군사력은 고슴도치 군단이다. 그러나 미국은 북한은 고슴도치가 아니라 전갈 군단이라고 주장한다.
나. 김정일의 군사 전략
① 한 방에 부숴버리기
② 싸우지 않고 굴복시키기
- 말의 폭력전
- 전갈의 독침: 장거리 보복 능력
- “미국은 선제 공격으로 수천 발의 순항미사일로 북한의 전략 목표를 공격할 것이다. ”
- “미국은 수십 대의 전략 폭격기 B52로 북한의 도시를 융단 폭격할 것이다.”
-“주한 미군과 한국군은 일제 폭격으로 북한으로 진격할 것이다.”
- 그러나 북한의 공격 목표는 남한이 아니라 미국 본토가 될 것이다.
- 북한은 미국의 선제공격을 받는 즉시 ICBM으로 일본의 미군 기지와 미국 본토의 전략적 목표를 향해 발사한다.
- 북한에는 전국 각 처에 10,000개 이상의 고사포 진지가 있다. (모든 군사시설과 산업시설은 지하에 있다)
- 북한의 지하에는 수천, 수만의 터널망이 구축되어 있다.
- 그러나 미국의 주요 도시는 완전 무방비 상태이다.
다. 북한의 전력(戰力)
① 북한에는 수천 발의 지대지 미사일이 실전 배치되어 있다.
② 파키스탄, 이란 등 이슬람 국가의 미사일은 모두 북한 미사일의 복제품들이다.
③ 북한은 세계 장거리 탄도미사일 ICBM 클럽의 네 번째 회원국이다.
④ 북한은 1998년 8월 31일 인공위성을 발사했다. 그것은 북한이 ICBM 발사 능력이 있음을 증명한다.
⑤ 휴전선을 중심으로 한 북한의 전력
무기명 수효
장거리 진공포
Long-range Artillary Tubes
서울 사정거리내에
500
170mm 곡산 총포
Kok-San Gun 서울 사정거리에 배치
240mm 다단계 로켓 발사대
Multiple Rocket Launcher
휴전선에 200대 배치
a. 지하 격납고에 대기하고 있는 장거리 다연발 로겟포 - 13,000개
b. 바다를 지키는 대함 순항미사일 동서해안 전역에 설치된 연안 포대 위의 전력은 포대의 이동 없이 12,000
자동화된 무기 시스템으로 한 시간에 50만 발을 여러 시간 동안 발사할 수 있다.
c. 북한군은 보병, 포병, 탱크부대, 기갑부대 및 특수부대를 포함한 170개 사단, 100만명 이상의 병력을
가지고 있다.
d. 북한군은 70만 보병, 8,000 포병 시스템과 2,000대의 탱크를 휴전선 전역에 배치하고 있다.
위에서 인용한 북한의 전략과 전력의 통계는 재일본 북한군사전문가 김명철이 말하는
<김정일의 군사 전략>과 Global Security Org. 의 <Operation Plans>의
기록에 의한 것이다.
라. 북한의 핵개발 전략
북한은 왜 핵무기 개발을 포기하지 않는가?
1994년에 미국과 북한이 맺은 핵 개발 동결을 위한 제네바협정에 따른 미국의 약속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늦장을
부려오기 때문이다.
① 첫째로 제네바합의서 제 2장 1절에는 분명히 6개월 안에 조건없이 양쪽이 투자에
관한 장벽을 줄이는 조처를 취한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미국은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무역 제재를 부분적으로
완화하는 조치도 취하지 않고 있다.
② 둘째로는 미국이 한반도에서의 대북한 핵 무기 선제 사용권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③ 세째로 경수로 원자력 발전시설 건설을 지연시키고 약속한 중유 공급을 제대로 지키지 않고 있다.
④ 넷째로 미국은 북한 정권의 붕괴 정책을 고수하고 있다.
⑤ 다섯째로 핵무기는 재래식 전력보다 훨씬 경제적이다.
북한은 제네바 합의 이후 4년 동안 자진하여 미사일 실험을 자제함으로 인내로 제네바
합의서를 존중했다가 1998년에 재개했다. 제네바 협정에는 미사일 실험 동결 조항이 없다.
B. 외교전략의 변화: The Transformation of Diplomatic Strategies
- 김정일 정권의 외교정책의 목적은 체제 유지가 첫째이며 그 전부라고 할 수 있다.
- 그러나 살아남기 위해서는 경제난 해소를 위한 외교가 필수적이었다.
- 김일성 생존 시에는 <적화통일> 목표에서 소련 붕괴 이후 <민족통일>에로 외교노선을 전환시키던
도중 그의 사망으로 그의 통일 외교적 추구는 끝나고 말았다.
- 김정일에게는 다급한 것이 체제유지와 경제위기의 극복일 수 밖에 없었다.
- 김정일의 대남관계도 <민족공조>라는 명분 아래서의 경제위기 해결을 위한 남한의 경제 지원을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체제유지’와 ‘경제살리기’ 외교는 모두 정권의 안정성을 보장 받는데 목적이 있다.
- 2002년 6월 15일 남북정상회담으로 얻어낸 <6.15남북공동선언>은 김정일 정권으로서는 더 바랄나위
없는 외교적 성공이었다.
- 그러나 김정일은 이 절호의 기회를 국제적으로 이용하는 데 실패하고 있었다.
- 그것은 위에서 지적한 그의 <선군정치>가 적대국가인 미국 부시 정권의 <압살정책>에 대응책이
될 것이라는 근본적 착각으로 말미암았다.
- 김정일은 협상외교전략보다는 <핵무기 개발 착수>라는 미국의 <압살정책>에 대한 <대립전략:
Contending Strategy>으로 맞서버린 것이다.
- 김정일 자신이 성공시킨 클린턴 정권과의 <제네바기본합의서>가 새로운 부시 정권에 의하여 짓밟혀지는
것을 참아내지 못했다.
- 결국 모처럼의 EU 국가들과의 국교수립까지로 실효를 거둘 수 없게 되고 말았다.
- 1948년이래 줄곧 한 정권의 전통을 지켜나온 북한 로동당 정권의 외교정책은 부시로부터 클린턴을 거쳐 아들
부시에 이르는 변화무쌍한 미국식 외교전략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 한편 남한 역시 노태우-김영삼-김대중 정권을 거쳐 노무현 정권에 이르는 4단계에 걸친 대북정책의 업치락뒷치락을
계속하고 있었다.
- 김정일은 자기 편에 이익이 될 효율적 외교전략을 제대로 개발해 내지 못하고 여러 가지 유형의 전략을 동원하여
맞대결만 할 뿐이었다.
1. 김정일 정권 외교전략의 유형별 특징
김정일 정권의 10년은
① 1994년 7월부터 1998년 8월까지의 유훈통치 기간과
② 1998년 9월 국방위원장 체제 출범부터 2001년 1월까지의 제 2기와
③ 2001년 1월 미국의 공화당 부시 정권 출범 이후 2004년 7월 현재까지의 제 3기로 구분된다.
이 세 기간별로 김정일 정권은 3단계로 그 외교전략을 변형시킨다.
(1) 김정일 정권 제 1기인 1994년 김정일 사망 이후 1998년 김정일 국방위원장
출범 이전까지의 4년의 과도기에 김정일 보여주었던 외교전략은 <체제유지>를 위한 고슴도치 외교(Porcupine
Diplomacy)전략을 구사한 기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전략은 세 가지 전술로 나타난다.
가. 첫째는 주변 4개국 즉,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등과의 접근 또는 적대 위협을 병행하는 유인(誘引)외교전술을
구사했다. 반미(反美)에서 통미(通美)주의로 대미관계 개선에 힘쓰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중국의 고위 지도자를 초청하고
일본의 정당 대표들을 초청하고, 러시아 방문과 초청 외교를 통해 대러 관계 개선을 시도했다.
나. 둘째로는 대 미군사 접촉을 시도하여 유해송환 등을 지속하고 중국과도 동맹외교를 강화했다.
다. 경제 개방정책을 지속적으로 전개하고 국제원조 도입정책에 주력하며 UNDP, UNIDO 등과 정촉하여 해외자본
유치를 적극적으로 시도했다.
라. NPT 탈퇴를 철회하고 제네바 합의문을 이루어내고 IAEA 감시단을 받아들이고 KEDO와 경수로 발전시설에
합의하기도 했다.
고슴도치외교는 자기를 헤치거나 건드리지만 않으면 상대를 헤치지 않는다는 종용한 유인전술이라고 할 수 있다.
(2)김정일 정권 제 2기인 1998년 9월부터 클린턴 정권이 끝나는 2001년
1월까지의 국방위원장 초기 3년은 <체제도약>이 목표였다. 이 시기 김정일은 <강성대국: 强盛大國>이라는
기치를 들고 자신의 국방위원장 체제를 출범시켰다. 김정일 정권은 강성대국의 성격을 다음 네 가지로 규정했다.
① 사상강국: 思想强國
② 정치대국: 政治大國
③ 군사강국: 軍事强國
④ 경제강국: 經濟强國
북한은 1998년 헌법을 개정하고 국가 권력구조를 국가 주석체제에서 국방위원장 체계로 바꾸고 군(軍)을 당(黨)
위에 두는 선군정치라는 혁명군사정권구조를 이루었지만 그 외교노선은 <비둘기외교: Dove Diplomacy>라는
부드러운 이미지를 나타내는 전방위 외교를 시작했다. 그것은 ①경제적 실리외교와 ②러시아와 중국과 미국과의 관계복원을
통한 균현외교, 그리고 ③미국과는 협상전력을 통한 관계 정상화를 시도한다. 이 협상전략은 클린턴 정권 말기의 국무장관
올부라이트 초청과 조명록 군사위원회 부위원장의 방미로 끝을 보고 공화당의 부시 정권 출현으로 비둘기외교를 끝내면서
④강경전술이라는 강수로 돌아선다.
(3) 김정일 정권의 제 3기는 2001년 1월 부시 정권의 대북 적대정책에 맞서기
위해 전갈외교(Scorpion Diplomacy)라는 독침전술로 전환한다.
- 이러한 외교전략의 전환은 부시 정원이 북한 김정일 정권을 <불량국가: Rogue State>로 쥬정하고
이라크와 이란과 함께 세 개의 <악의 축: Axis Evil>로 발표한 데 대한 <체제 수호>를
위한 것이었다.
- 따라서 북한의 외교전략은 적대세력의 정책 변화에 따른 대응적 전략 변화의 성격을 가진다고 보아야 한다.
- 김정일 정권은 지난 3년 부시 정권의 선제공격, 대북 군사행동 불사의 강경정책에 맞서기 위해서 전갈(Scorpion)이
되든지 살모사 같은 독사(Venomous Snake)로 변해버린 것이다.
- 전갈외교와 독사외교는 미국의 미사일 방어체제에 의한 북한정권 궤멸전략과 선제군사공격 위협에 대한 필사의 저항(Resistance
of Desperation)이라고 할 수 있다.
- 북한으로서는 현재의 부시 정권의 김정일 정권 제게전략 앞에서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 여기에 남한정권의 북한정권 붕괴라는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외교적 능력에 한계가 있다. 핵무기 개발이라는 최후의
자폭수단을 택하고 있는 북한과 미국의 김정일 정권 제거하는 두 개의 극단주의의 충돌을 막을 수 있는 길은 한국
정부가 미국을, 중국이 북한을 한걸음씩 물러서게 하는 중재역(Arbitration Role)을 맡는 길밖에는 다른
길이 없다.
- 한국은 미국의 위압적 전술(Aggressive Tactics)을 비공격적 전술(Non-Aggressive Tactics)로
한 발 물러서게 하고, 중국은 북한의 핵 개발 포기를 통한 흥정 전술로 물러서도록 하면서, 한국과 중국과 일본은
북한에 대한 경제 지원을 약속하고, 미국은 북한에 대한 경제제재를 해제하고, 북한 체제의 안보는 중국과 러시아와
일본과 미국이 함께 문서로 보장하는 데까지 6자회담이 성공한다면, 한국은 한미공조와 함께 북한이 추구하는 민족공조를
위해서도 적극 나설 수 있어야 한다.
III. 통일선교의 방향
21세기 세계 선교의 패러다임은 전혀 새로운 선교 세력에 의하여 짜여지고 있다.
Bryant Myers는 20세기 말을 서구 선교 세력과 비서구 선교 세력의 교체 시대로 보았다. 그는 또한 21세기의
선교를 비서구 탈식민지 국가들에 의한 새로운 선교의 패러다임으로 Holism in Mission (全論的 宣敎)을
내세웠다.
나는 Hoslistic Mission이라는 이 용어를 우리 말로 <전방위 선교>라는 말로 바꾸어 놓았다.
다시 말해서 21세기 선교는 신앙, 언어, 문화, 학술, 그리고 기아와 질병, 사회와 민족과 국가와 국제 관계의
화해와 평화 등 인류의 미래와 생명의 모든 문제를 포괄한 Holistic Mission, 즉 <전방위 선교>로
확대되어야 함을 말한다.
이러한 전방위 선교의 Holism에 대한 규정으로 보아 한국 기독교의 민족통일 문제 인식과 대북 활동에도 전도
외적인 모든 인도적, 사회적, 민족적 활동을 종합한 총체적 전방위적 선교의 길로 가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1. 대북활동의 기능별 분류와 평가 (1980-1994): Functional Classification
of Mission to North Korea
가. 연구 활동
(1) 민족 통일 환경 연구
(2) 북한교회 소멸 과정과 잔존 신도 분포 현황 연구
나. 민족 화해와 평화통일 운동
(1) 북과 해외기독학자 대화
(2) 해외한인교회 지도자 북한 방문
(3) 세계교회협의회 통한 남북교회 지도자 통일 대화
(4) 미국 NCC와 PCUSA를 통한 북미 대화
(5) 한국 NCC와 조선그리스도교도연맹 대화
다. 대북 인도주의적 지원 활동
(1) 식량 지원
(2) 의료 지원
(3) 농업, 축산 지원
라. 기독교 도서 지원사업
(1) 성경, 찬송 기증
(2) 평양신학원에 기독교 도서 기증
(3) 김일성종합대학에 기독교 도서 기증
마. 교육 및 학술, 문화 교류 사업
(1) 해외기독학자 평양신학원 방문 교수 활동
(2) 해외기독학자 김일성종합대학 종교학과 설치 협력 및 방문교수 활동
(3) 미국 대학 총장단 김일성종합대학, 김형직사범대학 방문과 교환 활동
(4) 해외기독교예술인 북한 방문 공연
(5) 숭실대학 동문 평양에 숭실대학 재건 추진
(6) 남한 교회 지도자 북한에 과학기술대학 설립 추진
(7) 남한 감리교 서부연회 평양신학원 지원 및 요한신학교 재건 추진
바. 해외 및 남북교회간 직접 교류
(1) 수교회와 칠골교회에 피아노 및 전자오르간 기증
(2) 성가대 가운 및 목사 가운 기증
(3) 남한 목사 부활절, 성탄절 및 주일 설교
(4) 남북공동기도문 채택
사. 1980년-1994년의 기독교 대북 활동의 평가
(1) 1980년대 초부터 국내외 진보적 기독교 지도자들의 민주화 운동과 통일운동이 기독교 대북 활동의 초석을
놓았다.
(2) WCC와 일본 NCC, 한국 NCC 등 진보적 진영의 기독교 남북대화를 위한 국제적 협력이 한국 교회의
냉전시대의 사고를 녹여주었지만 이념적 좌경 편향이 있다.
2. 김정일 정권 10년간의 대북활동 변화 추세
가. 해외한인교회의 대북활동 감소
나. 북한, 중국 국경지대 국내에서의 탈북자 지원 활동
(1) 중국 내 탈북자 보호 활동
(2) 입국 탈북자 보호와 전도 활동
(3) 북한 인권문제 시민운동
(4) 지하교회 접촉 활동
다. 북한학과 설치 및 북한 선교요원 훈련
(1) 기독교 대학에 북한학과 설치
(2) 통일선교대학 운영
라. 이산가족 찾기 지원 활동
(1) 국내 조직을 통하여
(2) 중국 변방 탈북자 지원 NGO를 통하여
(3) 일본 및 미국 내 대북 활동 조직을 통하여
마. 남한 기독교단체들의 북한 공식기구를 통한 식량, 의료 및 경제지원 활동
(1) 한민족복지재단
(2) 한국기독교총연합회
(3) 한국교회협의회
(4) 각 교단 총회 북한선교위원회
(5)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등 NGO 단체
바. 1994년 이후 10년간의 기독교 대북활동 평가
(1) 1990년대 이후 한기총 등 보수 진영의 한국 대북 활동은 인도주의적 접근에 국한되고 북한교회 재건운동이라는
가진 자와 힘있는 자로서의 시혜자와 정복자적 자세와 남한교회 이식 정책에 문제가 있다.
(2) 분단 극복과 민족 화해에 대한 연구가 부족하다.
(3) 북한 교회의 소멸 과정과 잔존 성직자와 신도들에 대한 조사활동이 태무하다.
3. 김정일 정권 후기의 바람직한 통일선교의 방향: The Advisable Course of Mission for
National Unification in Latter Stage of Kim Jong Il’s Regime
가. 대표 통일한국의 민족적, 신앙적 지도자 표본 연구
(1) 주기철 목사
(2) 손양원 목사
(3) 조만식 장로
(4) 백범 김구 선생
나. 통일한국 시대의 교회를 위한 준비
(1) 민족분열과 북한교회 소멸에 대한 교회 지도자들의 책임 확인과 회개운동 전개
(2) 북한 잔류 교회지도자들과 신도들의 행방에 대한 연구조사
(3) 북한의 풀뿌리신도들의 소생을 위한 생활지원전략수립
(4) 북한 전역의 그루터기교회 뿌리찾기와 육성전략 수립
다. 화해선교와 평화선교로서의 통일선교신학 정립과 활동
(1) 한국교회 초기 민족교회 정신과 원리의 연구
(2) 북한정권과 북한사회와 북한민중을 위한 접근 방법 개발을 위한 화해와 평화의 복음에 관한 성서적 연구
3. 화해협력과 선교환경 조성을 위한 전방위적 선교예비활동(Holistic Pre-evangelistic
Ministries) 전개
- 화해의 선교(Reconciliation Mission)와 평화선교(Peace Mission)의 신학적 기초는
교리적 확신의 타협 없는(without compromising doctrinal conviction) 접금이라는
원칙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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