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WMC1992 제2차 한인세계선교대회 > 다섯째날 1992년 7월 31일(금)
주제강연 - "세계선교를 위한 한국교회의 선교협력"
우리 한국에 복음이 전파된 지 100여년이 지나면서 한국교회는 세계가 놀랄 정도로 성장하였다. 현재 34,000여개의 교회와 12,000,000명에 육박하는 신도수를 보유한 오늘의 한국교회가 세계복음화의 주역으로 부각되고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우리 한국교회는 세계선교를 해야 한다는 자각을 한 70년대 후반부터 선교사들을 파송하기 시작했고, 80년대에는 본격적으로 교단이나 선교기관 등을 통해서 수많은 한국선교사들이 세계 각처로 파송되었다. 그동안 정기적으로 발간되는
선교보고지를 통하여 우리 선교사들이 활발한 선교활동을 하고 있다는 보고를 듣는 것은 심히 고무적인 일이다. 또한 지난 2-3년간은 소련, 동구권의 공산체계가 붕괴되면서 그동안 선교가 어려웠던 공산권에 복음을 전해야겠다는 긴박생의 고초와 함께 각 선교기관과 개교회에서 소련, 헝가리, 루마니아, 몽고 등지로 선교사를 파송하였고 재정지원도 급히 시작하게 되었다.
한국교회 특유의 집회열과 기도운동, 전도의 열정 등이 해외선교에도 헌신적으로 나타나게 된 것은 사실이지만, 해외선교를 수 백년 앞서 실시해 온 서구교회나 미주교회에 비하면 경험적인 면에서 뒤지고 그들이 실수했던 부분들을 되풀이하는 면도 없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세계선교의 사명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 전세계 한국인 선교사들과 한국교회 지도자들, 선교전문가들을 격려하고 도전하며 함께 연구하기 위해서 4년 전에 제1차 한인세계선교대회를 개최하게 되었었고,
이제 금년에 제2차 대회를 같은 장소에서 개최하여 다시 한번 한인 크리스천들이 지상명령 수행이라는 동일한 목적 아래 모였다는 것은 모임 그 자체가 중요한 의미를 주고 있다고 확신한다.
선교는 대상, 방법, 전략 등에 있어서 다양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팀웍이 필요한 것인데 우리 한국교회는 이 팀웍의 훈련이 비교적 약한 편이라고 생각한다. 요즘에 양극화 현상을 보이고 있는 복음주의 운동과 에큐메니칼 운동의 발단도 선교지에서 발생되는 분리현상을 극복하기 위해서 모여진 에딘버러 대회 이후의 발견되어 온 산물이고 보면 연합이란 것이 그렇게 쉬운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그러나 생경이 가르쳐주는 연합의 의미와 한국인, 한국교회라는 동질성 속에서 세계
교라는 대명제 아래 연합을 도모하자는 것은 우리가 하나의 공통분모를 가지고 시작하는 것이라서 긍정적인 결과를 창출해 낼 수도 있으리라고 믿는다.
1. 선교를 위한 연합에 관한 성서적 선교신학의 정립
교회연합을 추구하는 대는 반드시 목적이 있어야 한다고 본다. 하나가 돼서 무엇을 하자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그냥 단순히 하나가 되는 것은 의미가 없고 동기유발에 있어서 아무런 강조점이 없는 것이다.
선교를 위한 연합을 추구한다면 먼저 선교신학의 정립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선교에 있어서 선교의 주체를 하나님으로 보는 것은 정당할 것이다. 하나님의 활동의 강조점이 “인간화(Humanization)냐, 복음화(Evangelization)냐?" 하는 데는 오늘 우리의 선교목적에 분명한 정립이 있어야 할 것이다. 현재 교회협의회가 강조하고 있는 정치, 경제, 문화. 타종교, 환경 등의 세상이 당연하고 있는 문제 속에서 비인간화된 요소를 제거하는 일에 대하여 복음주의 측에서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구원의 우선권을 교회협의회가 받아들이도록 요구하고 있다. 이와 같은 문제는 비단 한국교회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세계의 교회가 두 개로 분열된 양극화 현상 속에서 서로 상반된 선교신학적 갈등을 해소하는 것이 급선무인데 이것은 조직체의 연합만으로도 안되며 프로그램만의 연합, 신학적인 연합만으로도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 연합은 성서가 말하는대로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심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요 14:20, 고전 12:13) 하나님의 은총을 확신하며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며 성령으로 일치됨을 경험하는 기초 위에서 연합이 출발해야 한다. 이런 연합운동은 본래의
‘하나님의 선교 (Missio Dei)’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을 요구하고 있다. 로잔언약의 제7문단에서도 교회의 일치성은 신성의 일치성이 파괴될 수 없는 것처럼 결코 파괴될 수 없다고 하여 진리 안에서의 연합이 이루어져야 하는 (엡 4:3-6, 13) 신학적인 이유를 말하면서 동시에 불일치된 교회의 증거는 화해의 복음을 무너뜨리지만 일치된 교회의 증거는 능력에 있다는 실용적인 이유를 들고 있다. (요 13:35, 17:21)
현재 심히 양극화되어 있는 현상도 교회협의회가 주장하는 하나님의 선교의 본래적인 의미를 회복한다면 복음주의와의 일치점을 쉽게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즉 선교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도권을 인정하는 ‘하나님의 선교’의 개념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은총의 활동이며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인간을 의롭다고 하시는 활동이며 성령의 의로 인간을 성화시키고 정의로운 사회건설에도 앞장서게 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활동을 말한다고 재해석한다면 복음주의가 에큐메니칼 운동과의
연합을 할 수 있는 근거를 갖게 되는 셈이다. 1952년 윌링겐대회에 이르기까지 교회협의회의 주도적 사상은 복음주의도 연합할 수 있는 복음적 기초를 유지하고 있다.
반면에 복음주의는 교회협의회로부터 배워야 할 것이 있음을 인정하고 사회적인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을 스스로 겸허히 반성하며 또한 협의회가 복음에서 이탈한 것을 깨우쳐 줌으로서 진정한 교회의 일치가 이루어지도록 해야 할 것이다. 죄의 개인적인 측면을 복음주의가 강조한 것은 당연하다 할지라도 죄의 사회성에 대한 관심을 교회협의회로부터 배워야 할 것이다. 특히 오늘날과 같이 서구교회의 주도권에 대한 비판의식이 팽배해 가고 제도적 교회의 지나친 교권주의와 개교회
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이 높아져가는 상황에서 하나님의 주도권을 회복하는 운동,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모든 교회가 연결되어 봉사해야 할 과제는 교회협의회의 교회들과 더불어 복음주의 교회들의 공통과제가 될 수밖에 없다. 실제로 복음주의 교회는 1966년 휫튼(Wheaton) 선언, 1974년 로잔언약을 통하여 교회의 사회적 책임을 인정한 것은 교회연합을 위한 복음주의의 큰 진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교회가 성서적 선교신학을 정립하도록 하는 오늘의 과제는 먼저 에큐메니칼 운동이 복음적이고 성서적인 기초를 갖도록 조언해야 하며 둘째로는 복음선교사역을 늦추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교회협의회의 비판과 피선교지의 의식적인 전환으로 서구중심적이고 교파중심적인 기존의 복음전도가 위축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러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간구하고 겸손한 자기반성을 거쳐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메시지를 증거하는 일을 중단해서는 안될 것이다.
또 한 가지는 교회 내부의 분열된 선교정책과 교파의 분열에 대한 회개와 반성이 있어야 할 것이다. 특히 한국교회가 교파분열로 인하여 경쟁적인 전도와 교회설립의 역동성은 가지고 있지만 협동성이 부족하다는 것에 모두가 자기반성을 해야 할 것이다.
2. 한국교회 선교협력의 실제적 문제점과 해결방안
교회협의회 복음주의 진영과의 신학적 양극화 현상 이외에도 또 다른 양상의 불일치와 비협조적인 요소가 있어 선교의 장애가 되고 있다. 한국교회가 성장한다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유기체적인 단체는 자라나야만 한다. 선교학자들은 일정한 지역이나 종족 중에서 신자의 수가 20% 미만인 지역을 복음화의 취약지로 간주한다. 그만한 숫자로는 자력으로 자기 종족이나 부족을 복음화하기 어렵다는 연구의 결과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교회가 통계상으로 25%의 기독교 인구는
그 수가 응집력을 가질 때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각 방면에 중요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으며 그에 따른 막중한 책임감도 갖게 되는 것이다. 과거 우리나라가 동란으로 인하여 시대가 불안하고 혼미한 상태에 있었을 때 기독교 신앙은 민족에게 소망을 주었고 위로가 되었었으며 사회에 공헌한 바가 크다. 그러나 교회 내적인 협력사업에는 미숙하고 미약한 면을 노출시켜왔다. 이는 교회 내적인 훈련에 의해 제자도를 따르는 신자를 산출해 내지 못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외적성장에 치중하다보니 삶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의 수를 증가시키는
데에 미약했다는 것이다. 또 하나의 문제는 우리나라 전통종교의 배경에서 성장한 기독교가 어려운 상황에서 절대자를 의지하는 신앙패턴이 강하게 작용하였고 급격한 산업발전에서 생겨난 자본주의 가치관과 생활양식에 동화되어 현세적이고 물량적인 성취, 성공심리 때문에 신앙생활의 동기가 지극히 사적인 한계에 머무르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점이다. 여기에 심한 기복신앙까지 작용하여 다른 사람을 섬기는 수고나 교회의 사회적, 세계적 책임을 다하고자 하는 겸비한 자세는 뒤로 하고 현세적 부의 성취나 과시적인 교회행사를 중요시하였던 것이다.
그러는 중에 교회는 내향적 교회중심주의에 빠지고 말았다. 교회가 하나님의 선교의 궁극적 목표로 착각한 것이다. 하나님의 선교의 최고목표는 하나님의 나라와 세계복음화이며 교회는 이를 수행하는 하나님의 기구이며 선교과정에서 형성되는 제2차적 공동체임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는 다분히 교회중심성을 드러내고 있다. 호켄다이크의 주장대로 교회중심적인 생각은 위법적인 축(Illegitimate Center)을 잡고 회전하는 것처럼 항상 정도(正道)를 벗어난다는 것이다. 교회성장에 대한 열망과 지나친 관심이 교회로 하여금 교회중심주의 내지는 개교회
중심주의에 빠지게 하는 폐단을 나타낸다.
각 교단마다 교세확장계획을 세우고 그에 관심을 집중하다 보니 특히 교세가 적은 교단에서의 상호협력은 더욱 어려운 문제로 남게 되는 것이다. 교회 밖의 기독교운동들(Para-Church Movements)이나 대학생을 겨냥한 학원선교단체들 간에도 선의의 경쟁을 해 오고 있으며 최근에 무수히 생겨나는 각종 선교단체들도 역시 성장, 자립, 자리굳히기 등으로 서로 경쟁하는 양상을 보여왔다.
고대 빌립보 교회에서도 이와 흡사한 양상을 발견하게 된다. 빌립보서 1장 15절에 보면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전파한다”고 당시의 경쟁적인 전도형태를 언급했으며 18절에는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법으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서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스도가 전파되는 것은 사실이나 어떤 그리스도로 전파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한국교회가 선교의 협력을 체계화하고 구체화하며 실제화하기
위해서 1988년 1월 18일에 한국교회의 6개 교단 선교지도자들과 선교단체 리더들이 모여 동반자적인 선교협력을 모색한 후 한국 동반자 선교회가 생겨나게 되었는데 이는 과거 개인주의적인 사역에 치중해 오던 것을 팀웍에 의한 사역으로 전환하고자 하는 실제적인 시도였다. 1988년에 개최된 제1차 한인세계선교대회는 북미주 한인 크리스천들의 세계선교를 의지를 집결하는 계기를 마련했으며 국내에서는 학생선교운동을 하는 단체를 중심으로 “선교한국”이라는 대회를 개최하여 한국적 “어바나”대회를 방불케 하였다. 특히 1991년 11월에 서울에서
열린 “2000년대를 향한 민족과 세계복음화대회”에서는 다시 한 번 교회와 교회, 교회와 선교기관, 선교기관과 선교기관들 간의 민족과 세계복음화를 위한 협력을 재촉구하였다.
1988년에 구성된 한국 동반자 선교협의회는 1990년에 한국세계선교협의회로 그 명칭을 바꾸어 각 교단과 각 선교단체가 팀웍을 이루어 선교활동을 할 수 있도록 조정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한국교회가 그동안 분열을 계속해 옴으로써 국가나 사회에 기독교적인 메시지를 목소리를 합하여 낼 수 없었다. 이에 국가와 사회, 남북통일 문제, 이단에 대처하는 문제를 위한 한국기독교의 목소리를 하나로 하기 위하여 1989년 12월 29일에 한국기독교총연합회가 창립되었는데 여기엔 각
교단을 총망라하고 각종 기독교단체를 가입회원으로 하여 명실공히 개신교의 총연합을 꾀하기 위하여 구성되었다. 여기서 하나로 연합된 한국의 기독교가 세계선교의 과업도 상호협력하는 가운데 수행할 수 있도록 제도적인 기구를 마련할 것이다. 조직적이며 제도적인 기구는 형성되어가고 있지만 문제는 각 교단이나 선교단체 지도자들의 적극적인 선교협력의 노력이 있어야 할 것이다. 복음주의적인 신앙의 전통에 선 교단과 교단의 관계, 한국교회와 서구 여러 선교단체들과의 관계, 한국교회와 피선교지교회와의 관계가 종속관계가 아닌 동반자적인
관계에서 복음화를 위해 협력해야 하는 것이며 교회와 선교단체의 관계에 있어서도 배타적이거나 경계의 장벽을 둘 것이 아니라 선교단체는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봉사하고 교회는 선교단체의 특성에 맞는 전문성을 발전시켜가도록 협력하여 전문성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솔직이 인정하는대로 교회와 선교단체 사이엔 모종의 갈등이 상존해 왔었다. 그 하나는 주도권의 문제이다. 어떤 특수한 종류의 사역에 대하여 누가 주도권을 잡는가 하는 문제이다. 한때 선교단체에서는 성경공부와 제자훈련의 부분에 있어서 상당히 많은 주도권을 잡고 교회의 성경공부를 이끌어 왔으며 선교사를 파송하는 일에 있어서도 기성교회가 그 중요성을 인식하기 전에 먼저 이를 실행하는 경우가 많았었으므로 선교에서도 주도권을 강조하였다. 또 하나는 지도력의
문제이다. 기성교회의 분열과 파벌현상은 지도력의 분산현상을 초래하였으며 한국교회를 대표한 지도자의 빈곤까지 느끼게 하였으나 국내외의 역사적 근거를 가진 선교회들은 일사분란한 지도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지속적인 발전을 해 왔었다. 세번째 문제는 사역의 특성이 서로 달라 우선적 사역의 강조점에서 갈등이 있었다. 교회가 감정적 부흥회를 통한 숫자의 증가를 꾀하면서 무속적 요소, 신비적 오류, 주관적 체험 중심으로 흘러 신앙의 근거를 약화시키고 있었고 이에 따른 사이비, 이단 종교도 파생되어 나올 정도로 부정적 요소를 보이고
있을 때 선교단체에서는 제자훈련, 선교 등의 과제에 집중적 노력을 하였으므로 기성교회를 향한 비판적인 자세도 보이고 있었다. 네번째 문제는 신학적인 것이다. 교회는 소속교단과 교파의 특정한 신학노선을 따르며 학문으로서의 신학의 위치가 상당히 높게 마련이다. 그러나 대개의 선교단체는 일반적이고 보편적이어서 평신도가 쉽게 따를 수 있다. 이런 갈등 때문에 교회는 선교회에 교인을 잃지 않으려 하고 한편 선교회는 교회로부터 배척당하거나 불신임을 받기도 했던 것이다.
이제 교회와 선교기관은 세계선교라는 긴급하고도 중대한 과업을 놓고 협력사업을 새롭게 시도해야 할 것이다. 지금은 갈등 속에서 우리의 귀한 인력과 재력 그리고 시간을 허비할 겨를이 없다. 21세기라는 시대적 변화와 예수 재림과 하나님의 나라 도래에 대한 많은 논쟁이 되고 있는 이 때에 교회와 선교단체는 이른바 동반자사역을 효과적으로 수행해야 할 시기이다. 두 구조는 상호협조적이며 특수성을 인정하면서 하나의 공통된 목표를 향하여 나아가도록 보조를 맞추는 작업이
필요하다. 실제는 이 두 구조는 결코 하나가 될 수 없으며 또 그럴 필요도 없을 것이다. 오히려 두 구조는 상존하는 긴장 때문에 서로 효과적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3. 선교협력이 가능한 분야들
해외선교를 우리에 앞서 실시해 온 서구의 교회나 선교기관들은 이 협력사역에 있어서 많이 성숙해 있고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관계를 가지고 선교현지에서나 본국에서 잘 협력하고 있다. 예를 들어 한국 월드컵선교회가 우간다에 파송한 김정윤 선교사가 사역하고 있는 클루바병원에서도 AIM 선교사가 함께 사역하고 있으며 MAF(Missionary Aviation Fellowship, 항공선교회)도 아프리카에 선교사들이나 물자들을 수송하는 사역을 협력하고 있다. WBC(Worldwide Evangelism for Christ)
선교회 국제총무인 Dietrich Kuhl 박사도 WEC 선교회의 선교현지에서 사역하는 고신, 개혁, 통합, 합동, 성결, 침례교 선교사들은 WEC의 가족이지만 그 기관과 더불어 일하는 선교사요 나아가서는 그리스도의 선교사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지체로 협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에 반해 개교회가 다른 선교기관이나 교단의 선교부와는 동떨어져 부실한 선교사 훈련원을 만들어 운영하고 선교사를 파송하며 전문적이고 구체적인 선교전략도 없이 선교사를 여기저기 파송하여 여러나라에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다는 공명심과 과시를 목적으로 하는 독단적인 선교도
있을 것이다. 여기엔 부작용이 많고 지속성이 약하다. 협력을 하면 힘이 덜 들 뿐 아니라 풍부한 사역을 가능케 하지만 단독적인 선교를 하게 되면 부담도 크고 한정된 경험을 되풀이 할 수가 있다. 그러면 어떤 분야에서 협력을 해야 하는가?
1) 정보의 교환
세계선교를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선 우선 정확한 정보가 나뉘어져야 한다. 정확한 정보가 제공되면 상황이 정확하게 분석이 되고 필요한 전략이 수립될 수 있다. 이 정보는 풍성해야 하기 때문에 정보교류에 교단 간에 선교단체간에 협력이 필요하다.
2) 선교사 후보자의 선정
현대의 선교는 폭넓게 기능화되어 있다. 옛날처럼 한 선교사의 가족이 어느 오지 밀림에서 평생을 보내는 형태의 사역은 거의 드물게 되었다. 선교지를 보는 관점도 지역적인 대상에서 특정적인 대상으로 바뀌었다. 과거엔 아시아나 아프리카를 대상으로 선교사를 보내었으나 지금은 모슬렘지역, 힌두지역, 불교지역 등의 특정한 타종교의 지역이라든지 어린이 선교지, 청소년선교 등의 연령적인 구분 하에 선교대상지를 정하며 가난하고 소외된 지역, 피난민 지역, 고아사역 지역인가,
또는 도시지역인가, 농촌지역인가를 고려하여 파송한다. 어느 교회에 이런 인적자원이 있으며 어느 단체에 이에 합당한 선교사 후보가 있는가 하는 것은 상호협력이 없이는 적임자의 발굴이 힘든 것이다.
3) 선교사의 훈련
최근 각교단에서 선교훈련원을 개설하여 다양한 훈련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는 것은 심히 바람직한 일이다. 현재 합동측 총회본부에서 ‘선교훈련원(M.T.I.)’이 운영되고 있고 장신대 안에 통합측의 ‘세계선교훈련원’이 있으며 기성측에도 ‘선교의 집’이 훈련원의 기능을 하고 있으며 고신측엔 KMIT가 있다. KOMF와 협력사역하는 GMTC와 외항선교회의 CCMTI, KIM의 선교훈련 프로그램 같은 각 선교단체의 훈련프로그램도 있는데 아직까지 긴밀한 교류가 부족한 실정이다. 시설과
재정면에서도 기대 이하고 열악한 상태이다.
선교사 훈련은 이론적인 면보다는 많은 부분이 실제적이며 실천적이어야 하는데 선교사로서 사역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 훈련을 담당하는 것이 더욱 효과적이라고 본다. 그리고 국내에서의 훈련은 그 자체가 간접경험이기 때문에 될 수 있으면 많은 선교사들의 사역간증이나 사역현장경험을 듣고 나누는 것이 필요한데 각기 다른 교단의 선교사들이나 선교단체 선교사들이 이러한 선교훈련프로그램에 상호교류하면서 경험을 나누고 자료를 나눈다면 각 훈련원이 공히 풍성한 효과를
얻게 될 것이다. 사역을 마치고 귀국한 선교사나 안식년을 맞은 선교사, 그리고 여러가지 업무로 인해 일시 귀국하는 선교사들이 교파나 선교기관을 막론하고 상호교류를 해야만 할 것이다.
4) 선교사 파송과 지원 및 관리
선교사를 파송할 때 한 교회가 단독지원 선교사로 파송하는 예가 많다. 한 교회가 지원할 수 있는 충분한 재정적 능력이 있어서 그렇게 한다고 이해가 되지만 여기엔 문제도 없지 않다. 교회 내에 갑작스런 변동이 있을 경우 (예를 들어 교역자의 이동, 교회정책의 변화, 예기치 않은 일 등) 그런 일로부터 신속한 다른 대처를 하기가 어려울 뿐더러 선교지에서 위급한 상황이나 큰 프로젝트가 생길 때 한 교회가 부담하기엔 무거운 경우가 생길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몇 교회가
지원을 분담하여 여러 선교사를 지원하게 되면 선교사의 지원도 안정되고 선교현장에서 예기치 않게 일어날 수 있는 사고 등에 책임을 분담할 수 있어서 효과적인 지원이 될 수 있다. 또한 파송선교사가 어느 특정한 사역을 위해 파송된다면 (예를 들어 의료선교, 문서선교, 방송선교, 선원선교 등) 그러한 사역을 전문으로 하고 있는 기관들과 협력하여 파송하게 되면 그 전문성을 유지하면서 좋은 사역을 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선교사의 관리는 가장 어려운 문제 중의 하나이다. 본국과 멀리 떨어져 있는 선교사의 영적관리, 행정적 관리, 생활과 사역관리 등을 원활하게 한다는 것은 심히 힘든 일이다. 그러나 다양한 선교정책과 선교사관리를 하고 있는 선교기관이라면 그 재료와 원리를 교회와 나누어 활용할 수 있다. 선교사가 함께 협력하는 피선교지교회나 교단이라든지 외국선교기관과 긴밀하게 협력하는 가운데 관리가 가능하다. 여기서 선교사 관리란 선교사를 감시, 감독하는 것이 아니고 그들을
보호하고 격려함으로 선교사역에 발전이 있도록 협력하자는 면에서의 관리인 것이다.
여기에서 발전하면 각 선교지에 지역구를 설정하여 (예를 들면 동남아시아, 서부아프리카 등) 지역 조정관(Area Co-ordinators)들을 세워서 그 지역의 선교사들의 상호협력을 도와주는 역할을 하게 하고 동시에 지역선교사들의 일반적인 관리의 임무도 수행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도 역시 본국의 교단 간, 선교기관 간의 협력이 원활한 가운데서 가능할 수 있는 일일 것이다.
5) 해외선교기관과의 협력
지난 70년대 한국교회가 세계선교를 위해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을 때는 서양선교단체 중심으로 선교가 이루어졌거나 몇몇 사람들로 구성된 그룹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었다. 초기의 한국교회가 제주도나 중국 산동성으로 선교사를 보낼 때 총회가 가결했었다. 그러나 60년대 이후엔 교단이 갈라지고 교권이 난무하고 교회비리가 많이 나타날 때 교회가 제구실을 하지 못하니까 교회가 해야 할 선교를 서양에서 들어온 선교단체들이 주도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최근 몇 년 동안
서양중심선교가 아닌 각 나라 각 교회 중심적인 선교를 해야한다는 소리가 한국 뿐이 아닌 아시아 여러나라 안에서 일기 시작했다. 한국도 이젠 한국교회 중심적인 선교를 하자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외선교기관들과 완전히 관계를 끊고 한국교회 단독으로 선교하겠다는 것은 아니다. 한국교회가 성숙한 모습으로 자주적이며 선교를 주도하고 책임을 지면서 서양선교단체와는 동반자적인 입장에서 서로 협력할 부분을 협력하고 우리 한국교회도 그들에게 기여하면서 함께 세계복음화를 이룩하자는 것이다.
우리 한국교회의 선교는 장기 정책수립에 따라 하는 합리적인 선교라기 보다는 즉각적인 행동위주의 선교를 해왔으며 한국선교사의 대부분이 교회가 존재해 있는 지역에서 선교하고 있다. 이것은 아직까지 우리 자체의 능력으로는 모험을 할 수 밖에 없는 선교적 상황이 많다는 의미이다. 여기에서 부득불 선교지의 교회와 협력할 수 밖에 없고 경험과 구체적인 계획이 있는 서양선교기관과 협력이 필요한 것이다. 한국교회는 이제 자신을 갖고 서양선교단체에 예속됨이 없이 자주적인
선교사역을 해야하는가 하면 겸손하게 배우는 자세로 친구요 동역자가 되어 저들과 함께 사역하는 것도 배워야 할 것이다. 우리 자체라는 집단적 개념, 우리 한국이라는 민족주의적 개념을 넘어서서 세계교회가 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라는 정신을 가지고 해외선교기관과의 바른 협력관계를 유지해야 할 것이다.
결론
세계선교의 시간은 제한적이며 이제는 우리 시대에 세계복음화가 반드시 성취되어야 한다. 지금은 교단의 교리나 형식 때문에 다투고 갈등할 시기가 아니며 세계에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이 없도록 속히 선교사역에 하나님의 모든 지체가 힘을 합쳐야 할 때이다. 교회는 자기성장 추구의 단계에서 벗어나 아시아와 세계 도처에서 부르며 손짓하는 오늘날의 마게도냐의 부름에 응답해야 한다. 또한 선교단체는 자기 기구의 독점적인 발전만 도모하지 말고 이 선교과업의 효과를 높이기
위하여 축적된 경험과 훈련기술 및 전략을 지역교회와 나누어야 한다. 그래야만 선교단체도 선교과업 수행에 중요한 몫을 담당할 수 있다. 교회가 선교의 주도력을 잡는 것이 더욱 바람직하다. 금세기에 우리 한국민은 세계 각처로 이민하여 한국인의 끈기와 저력을 보이며 이국 땅에서 잘 정착해 왔다. 그리고 한국 사람이 모여 사는 곳엔 거의 예외 없이 교회가 설립되고 많은 성도들이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우리 교민들의 교회는 본국 내의 교회가 가질 수 없는 놀라운 문화적응력을 가지고 있으며 이중언어를 구사하는 장점과
상당한 국제감각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다양성을 가진 북미, 남미, 호주, 유럽, 아시아 등지에 있는 한인교회들이 세계선교를 위한 협의체를 구성하여 적극적으로 상호협력해 간다면 2천년대는 명실공히 한인세계선교의 세기가 전개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한국교회에 전달해주신 세계복음화의 바톤을 쥐고 호흡을 맞추어 힘있게 달리는 선교의 역군들이 되어야겠다.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일심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아무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를 인하여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저희에게 멸망의 빙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빙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니라.” (빌 1:2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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