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WMC1992 제2차 한인세계선교대회 > 셋째날 1992년 7월 29일(수)
주제강연 - "부르심에 응할 선교사의 준비"
본 대회 주제는 “와서 도우라”이다. 이 절실한 요구에 가서 도울 자가 누구인가? 이는 이사야 6장 8절과 갈은 응답을 할 수 있는 자이다.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라고 응답할 사명자가 있어야 한다.
우리가 여기 모여 대회를 하고 세상의 주목을 받을 만한 역사적인 행사를 치룬다 해도 구체적으로 선교현장에서 선교할 인물이 빈곤하면 효과가 없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오라” 부르시고 훈련시켜서 “가라” 명하셨다. 이 순서는 오늘도 동일하게 진행되어야 선교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부르심에 응할 응답자가 중한 것을 깊이 인식할 필요가 있다. 비유컨대 국방을 위하여 온 국민이 잘 후원한다 할지라도 전선에 나갈 장병이 없다면 국방은 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선교현지에 가서 구체적인 선교활동을 할 선교사 본인과 보내는 단체들이 어떤 준비를 해야 좋은 효과를 나타낼 수 있을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몇가지 항목을 정리해 보자.
1. 선교사의 자질
1) 구원의 확신
가장 평범한 표현같지만 가장 귀중한 내용임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이는 비록 선교사만이 아니라 기독교 계통의 모든 일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은 기필코 이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 구원의 확신이 없는 자는 주의 일군이 될 수 없다. 구원의 확신이 없이는 한 직업인으로서는 가능할 지 몰라도 사명자는 될 수 없다. 나 같은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감격이 가슴에 벅차지 않는 한 주의 일에 헌신할 수 없을 것이다.
이 과정은 머리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가슴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는 곧 체험적인 사건이 자아를 붙잡아 주는 힘이 되는 것이다. 주변의 어떠한 시험과 유혹이 있을지라도 내가 느낀 구원의 확신이 있는 한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선교사는 남달리 하나님의 부르심에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굳게 서약하고 나선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더욱더 구원의 확신이 강하고 확실해야 한다. 다른 모든 조건들이 다 갖추어졌다 할지라도 구원의 확식이 없다면 엔진 속에 불이 꺼진
상태와 같은 것이라 비유할 수 있다. 주님이 죽기까지 하시면서 나를 구원하여 주셨는데 그가 원하여 명하는 것을 어찌 하지 않으랴 하는 마음가짐이 있어야 이 일을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마음가짐은 구원의 확신이 있는 데서 생겨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의 은총에 감격한 마음이 부르심에 응할 자의 기본 자세이며 준비의 기초가 되는 것을 재인식해야 할 것이다.
2) 소명의 이유
보내는 단체나 가는 본인이나 소명의 이유를 알아야 한다. 그것은 이 대회의 주제에 잘 나타나 있다. 사도 바울이 전도하던 중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와서 도우라”고 간청한 형편과 같이 오늘날에도 현대적 마게도냐 사람들이 간곡히 “와서 도우라”는 호소를 하고 있다. 이와 같은 호소에 하나님은 그들을 구원키 위하여 사명자들을 부르고 계시는 것이다.
조난자가 구명을 호소해 올 때 도의적 측면에서도 신속히 구해주어야 하는 것처럼 죽어가는 사람들을 무관심 속에 내버려 둠으로 죽었다고 하면 책임이 어디에 있을 것인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죄의 값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버려둘 수 없어 그들을 구원키 위하여 가서 도울 자를 부르시고 계신다. 여기에 분명한 소명의 이유가 있는 것이다.
주께서 친히 명령하시기를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하셨고 또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셨다.
이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일군이 필요하다. 이 일군을 하나님이 부르신다. 베드로를 부르시듯, 마태를 부르시듯 필요한 종들을 부르고 계시는 것이다.
3) 선교사의 각오
하나님의 소명은 주권적 방법이다. 응답자와 의논하여 소명 가부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일방적인 방법이라는 뜻이다. 실례를 하나 들면 사도 바울의 소명이다. 다메섹 도상에서 강압적 방법으로 굴복시켜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그릇을 삼으신 것이다.
이번 경우는 응답자의 의사가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행사이다. 여기서 우리 응답자의 자세는 순종할 뿐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피조물로서의 창조주에게 구원받은 자로서 복종과 아멘의 자세여야 한다. 이것은 억지로가 아니라 감격 중에서 자원하는 마음으로 되어지는 것이다.
사람마다 일생을 살아가는 데는 직업이 있다. 그런데 밥을 먹기 위하여만 직업을 가진다면 생의 보람을 느낄 수 없을 것이다. 어떤 일을 함으로써 생계를 유지하기는 하지만 그 일에 헌신적인 마음을 가지고 큰 보람을 느끼면서 일을 한다면 그는 사명자가 될 것이다.
선교사는 그 일을 함으로써 생활을 하기는 하나 직업인이 아니다. 선교사 중에 생계를 위하여 이 일을 억지로 하는 이는 단 한 사람이라도 없으리라 확신한다. 선교사 모두는 구속의 은총에 감격하여 주님의 부르심에 전적인 헌신을 다짐하고 나선 이들이라 믿는다.
100여년 전 우리나라에 와서 활동한 선교사들을 생각하면 익히 알 수 있다. 문화와 생활수준의 격차는 이루 표현키 어려울 정도로 차이가 있었으나 참고 견디며 복음을 전하였다. 본인이 신학교에 다닐 때 작고하신 Cooper 목사님이 가르치셨는데 우리나라에 와서 선교하실 때 경험담을 종종 들려 주셨다. 그 내용 중에는 겨울에 발톱이 얼어 빠지기도 하고 지게를 지고 산을 넘으며 복음을 전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또 어느 집에 들어 가서 예배를 드리면 이상한 사람이 왔다고 구경하기 위하여 문구멍을
여러 개 뚫어놓기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쿠퍼 목사님은 창호지를 여러 장 가지고 다니면서 예배드리고 나올 때마다 창호지를 한 장씩 주고 나왔다는 것이다.
그 외에도 선교 초기에 선교사들이 당한 고난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이 많았다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이는 응답자들의 철저한 헌신의 각오에서 참을 수 있었던 상활등이다.
4) 선교사의 사명감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선교사들은 위에서 언급한대로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주님의 소명 이유를 알고 일할 각오를 가지면 다음 단계는 철저한 사명감이 생길 것이다.
사명자는 그가 하는 일에 자신이 몰입되어 다른 일에 대하여는 옆도 뒤도 돌아보지 말아야 참 사명자가 될 수 있다. 벧스메스로 법궤를 실을 수레를 끌고 가던 암소들 같이 송아지 젖을 뗀 슬픔이 있어도 풀을 뜯고 싶어도 물을 마시고 싶어도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곧장 앞을 향해서만 갈 수 있었던 것은 법궤 운반의 사명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명자는 사명을 받은 그날부터는 자기가 자신의 뜻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라 부르시고 맡기신 이의 뜻을 따라 행하는 자이다. 가기 싫어도 가라 하면 가도, 가고 싶어도 멈추어라 하면 즉시 서야 하는 자이다. 그야말로 “부름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괴로우나 즐거우나 주만 따라 가오리다”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사명자는 주님의 기도대로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하는 자세로 일하는 사람이다. 사명자는 소명하신 이의 명을 따라 가는 길에는 목숨을 걸어야 한다. 마치 군인이 전쟁터에서 돌격명령을 받으면 죽음을 각오하고 적진으로 진격하듯 주님의 명령을 수행하는 사명자도 주의 일을 위하여 죽음을 각오해야 한다.
지난 1월에 우리 교회에서 선교사를 파송한 현지를 순방한 일이 있었다. 마닐라에서 1시간 정도 남쪽으로 비행하면 두마게티시가 나오는데 거기서 약 100Km 차로 더 가서 말을 타고 2시간 이상 산을 올라가서 선교현장에 도착하였다. 이곳 이름은 히말라루드이고 신인민군 영향권에 있는 지역이었다.
이 교회를 개척하여 선교하고 있는 곽춘식 선교사에게 내가 묻기를 “위험을 느끼지 않느냐?”고 하였더니 “감독님! 죽음을 각오하니 모든 염려가 없어집니다”라고 대답했다. 이렇게 대담하는 27세 젊은 선교사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하였고 눈동자에는 빛이 나고 있었다. 나는 그가 대답하는 모습에서 사명자의 굳은 의지를 찾을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철저한 사명감이 없이는 선교사가 될 수 없을 것이다.
2. 선교사의 준비
선교에 있어서 선교하는 당사자가 중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므로 주님의 부르심에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응답하는 선교사들은 구체적으로 어떤 준비를 갖추어야 할 것인지 생각해 보자.
1) 체력
체력은 선교력과 동일시할 정도로 귀하다. 선교사의 일은 결코 안일한 일이 아니다. 남다른 고생과 어려움을 당하는 직분이다. 식문화도 다르고 기후도 다르고 생활환경도 다른 선교지에서 일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더욱이 풍토병에 걸리기도 쉬운 선교지가 얼마든지 있다. 이러한 환경을 극복하고 일하려면 건강한 체력을 유지하지 않고는 안될 것이다. 선교지에서 몸이 약하거나 병들면 그 일을 중지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선교사는 건강하도록 체력을 단련시키지 않으면 안된다. 대략 건강
지는 선천적인 좋은 골격과 자신의 노력, 그리고 하나님의 축복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건강유지 방법에 대하여는 세밀하게 말씀드릴 수 없으므로 선교사 각자가 이 문제에 철저히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특별히 선교현장에서 일하시는 선교사 여러분들과 가족들이 건강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그리고 새로 선교사가 되려는 일군들은 일찍부터 건강에 자신있는 체력을 형성하도록 최선을 다하시기를 부탁한다.
2) 지력
특별히 선교지에서 일하려면 다방면에서 아는 것이 많아야 한다. 만물박사가 되어야 한다. 주민의 삶에 관계되는 모든 분야에 상식을 가지고 지도해야 선교사의 역할을 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폭넓게 아는 지력이 필요하다. 대략의 경우는 선교지 주민들이 선교사의 수준보다 낮은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자연히 그들을 지도해야 하기 때문에 넓은 지식이 요청된다.
선교사는 특별히 현지 언어를 속히 배워 그들과의 대화에 지장이 없도록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선교사는 모든 면에서 막힘이 없도록 주를 위해서 배우고 주를 위해서 알고 주를 위해서 활용되도록 해야 한다.
3) 재력 (才力, ability, talent)
이 재력은 천부적인 소질에 관계되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종종 타고 난 재능이 있는 사람들을 본다. 그렇지 못할 경우는 배워서라도 특별한 기술을 몇 가지 가지고 있으면 선교에 도움이 될 것이다. 한 가지 실례를 들면 식수가 여의치 못한 지역에서 양수기 조작법을 앎으로 그 양수기를 가동시켜 주민들에게 물을 마시게 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또 위급한 환자를 다룰 수 있는 응급조치법을 익혀 둔다면 선교활동에 매우 도움이 될 것이다. 언제 어떤 경우를 만나도 척척 처리할 수 있는 재간을 가지고 있어야 1등 선교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사도 바울은 장막 짓는 기술이 있어서 선교비까지도 자급자족할 수 있었으니 참으로 이상적인 선교사였다 할 수 있다.
4) 영력
선교사가 모든 조건을 다 갖추었다 할지라도 영력이 없으면 그 일을 할 수 없다. 이는 마치 날으는 비행기가 모든 조건을 갖추었다 할지라도 기름이 없어진다면 추락하고 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예수께서 사데교회를 향하여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라고 말씀하셨는데 만일 영력이 없어진다면 이와 같이 되고 말 것이다. 만일 선교사가 영력없이 얕은 인간적인 방법만 동원하여 선교활동을 하려한다면 열번 백번 실패하고 말 것이다. 왜 그런고 하니 이 일 자체가 사람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일, 하나님의 힘으로 하는 일이기에 하나님이 주시는 영력 없이는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라고 고백한 것이다.
우리가 이 영력을 받아 간수하려면 두 가지 방법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 하나는 받으려고 노력하는 인간의 방법과 또 하나는 하나님이 주시려는 성령의 방법이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시기를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곧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얻는다는 말씀이며 이 능력을 믿음으로 땅끝까지 이르러 주님의 증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선교사들이 꼭 알아야 할 내용 중의 하나는 선교임지로 보내실 때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어서 보낸다는 사실이다. 누가복음 10장에 보면 당시 제자들을 둘씩 둘씩 짝지어 보내실 때 어린 양을 이리 떼 속으로 보내는 것과 같이 약한 형편이었으나 그들이 승리하고 돌아왔던 것이다.
이렇게 승리한 이유는 주님이 그들을 선교지로 보내실 때 그들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당시 제자들은 비록 약하였지만 그들을 해할 자가 결코 없었던 것이다.
전 세계에 파송되어 일하고 있는 선교사 여러분들 모두가 영력의 소유자가 되시기를 바란다. 이 귀한 영력을 받고 그 영력이 감퇴되지 않도록 끊임없이 기도해야 할 것이다. 기도하지 않음으로 영력이 없어지면 알맹이 없는 껍데기 선교사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3. 선교사를 파송한 단체 (개인)
선교는 부르신 하나님과 그 부르심에 응답한 선교사, 그리고 후원단체, 이 삼자가 합해져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다행하게도 한국은 선교사 지망생도 많고 이들 선교사를 후원하는 단체도 많이 있음을 감사한다. 이 단체나 개인들이 잘 후원하고 있으나 몇 가지 강조할 것이 있다.
1) 애정적 관심
선교단체는 선교사를 보낸 후 깊은 애정을 품은 관심이 계속되어야 한다. 남이 하니 나도 한다는 의미 얕은 공명심으로 해서는 안될 것이다. 이런 마음으로 했다가는 머지 않아 관심이 없어지고 말 것이다.
나 대신 선교지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있다는 생각, 내 가족 중의 한 사람이 갔다는 생각을 가진다면 이 일이 관심 밖의 일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관심을 가지기만 한다면 격려의 편지도 보내고 선교현지를 순방도 하여 협력이 끊이지 않을 것이다. 무관심은 그 일의 포기를 의미하는 것이므로 선교단체는 끊임없는 관심을 가지고 후원해야 할 것이다.
2) 간절한 기도
위에서도 말한대로 선교는 사람의 힘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는 것이기에 끊임없는 기도가 절대 필요한 것이다. 기도는 하나님의 능력을 끌어오는 든든한 밧줄과도 같은 것이다. 선교단체에서 간구하는 기도는 선교현지의 일군에게 큰 능력으로 임할 것을 확신한다. 그러므로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범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3) 가족 돌보기
선교사가 자녀교육 등 여러가지 형편으로 가족을 본국에 남겨둘 수 밖에 없는 선교사들도 있다. 가족들을 거느린 호주는 가족의 형편이 편안해야 평안한 마음으로 일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선교단체는 선교사 가족까지 책임지고 잘 돌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선교사로 하여금 아무 근심없이 선교사역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4) 넉넉한 선교비
피선교국의 형편은 대부분 선교사를 파송하는 나라보다 경제, 문화, 생활 형편에 낮은 수준이 경우가 많다. 이 말은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효과적으로 쓸 수 있는 물질이 많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우리나라가 선교를 받던 초창기 경우를 보더라도 익히 이해되는 내용이다.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의료시설, 교육시설을 설립하여 복음전파의 터전을 삼았던 것이다. 이 일들을 위하여 재정이 필요하였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는 일이다.
선교한다는 우리가 선교사 생활비나 겨우 보내는 형편으로는 역부족임을 알아야 한다. 이 말은 선교지에 돈만 뿌리자는 표현은 결단코 아니다. 선교비를 많이 투자하여 효과적으로 쓰자는 것이다. 교회부지나 병원부지를 구입하며 신학교를 건립하여 현지 교역자를 양성하는 등 실로 돈 들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그러므로 선교단체는 선교기금을 많이 마련하여 보내도록 해야 할 것이다.
4. 결론
전 세계에 흩어져 복음을 전하고 있는 선교사 여러분, 또 같이 고생하는 선교사 가족 여러분, 그리고 이 일을 위하여 후원하고 계시는 교회와 여러 선교단체에 관계하는 여러분께 중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아직도 지구촌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마게도냐 사람같이 “와서 우리를 도우라”고 부르짖고 있다. 지금까지도 많은 수고를 하셨으나 아직은 시작 단계임을 우리 모두 자인해야 한다. 그러므로 앞으로 더욱 온 세계를 향하여 복음을 널리 전해야 되겠다.
우리가 교만해서가 아니라 오늘 이 시점에서 볼 때 아무리 생각해도 선교의 주역은 우리라고 여겨진다. 그러므로 이번 대회를 통하여 폭발적인 서교 열의가 일어나기를 바란다. 천지가 진동하게 선교의 새로운 장이 열리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성령께서 강하게 뜨겁게 능력있게 역사하여 주실 줄 믿는다. 할렐루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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