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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한인세계선교대회 > 둘째날 > 주제강연

 [둘째날] 주제강연 – "한국교회 선교운동의 역사적 회고와 전망

 

 
 

조동진 / 국제선교협력기구(KIM) 총재, 윌리엄케리대학교 교수, 고려연구소 소장

 
 

KWMC1992 제2차 한인세계선교대회 > 둘째날 1992년 7월 28일(화)

주제강연 – "한국교회 선교운동의 역사적 회고와 전망"

 

I. 회고 (Look back)
 

1. 한국교회 초기 선교운동
 

우리 민족교회의 태동과 형성과정은 다른 모든 피선교국가의 그것과 크게 구분된다.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모든 나라에 대한 서구선교는 19세기 제국주의 자국의 식민정권의 보호 아래서 이루어졌다. 예외는 한국과 중국과 일본의 경우 뿐이다. 우리나라에서의 서구선교는 반기독교 일본제국주의 하에서 자유와 독립을 갈망하는 민족의 편에서 시작되었다. 이러한 예외적인 국제환경 속에서 성장한 한국교회는 당연히 민족주의적일 수 밖에 없었고 반일 반제국주의일 수 밖에 없었으며. 또한 동시에 세계주의일 수 밖에 없었다.

서구 식민정권 하에서 성장한 다른 모든 나라의 교회가 종속적 외래종교로서 민족의 해방과 독립을 저해하는 반민족적 서구 식민정권의 앞잡이로 단죄되어 국가와 민족 앞에 설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었던 대 반하여 우리 민족의 교회는 나라 잃은 민족의 구심점이 되고 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위한 염원을 나라 밖으로 호소하여 세계교회들과 유대를 이루게 하고 민족의 국제적 고립과 세계로부터의 차단을 면하게 했다.

이러한 민족의 운명과 국제적 환경이 우리민족의 교회를 애초부터 외항적 성격의 교회로 성장하게 했다. 한국민족의 현대사와 한국 기독교 역사의 상호관계는 서구 식민지의 교회에서 볼 수 없는 공동운명체적 상호관계를 가지고 있다.
 

1) 이씨 조선의 망국과 민족선교

한반도에로의 기독교의 전래는 중국을 왕래하는 한국인들과 중국 대륙을 찾는 스코틀랜드 선교사들과 중국대륙에서의 접촉에서 비롯된다. 19세기 후반 1860년대 이후 중국대륙은 세계 열강들의 식민정책 각축장이었다. 중국의 해안지역은 남쪽으로부터 북동쪽에 이르는 홍콩과 상해, 청도, 지부, 영구, 대련에 이르기까지 포르투갈, 영국, 미국, 프랑스, 러시아 등은 이 모든 항구 도시를 점거하고 ’외국인 특별조계(特別祖界)‘라는 특권을 가지고 있었다.

서구 선교세력은 자연스럽게 자국 정부의 식민정책이 아시아로 뻗어나가는 길을 따라 뒤쫓아 왔다. 당시 이씨 조선의 국제 관계는 영토의 지리적 조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북방 외교와 통상의 길을 가고 있었다. 서북쪽으로는 우장과 고려문을 거점으로 산해관을 넘어 북경을 상대로 하고, 동북쪽으로는 할빈을 거쳐 시베리아의 해삼위를 거점으로 하는 러시아와의 외교통상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러한 무역과 통상에 관계했던 조선 사람들은 주로 서북인들이었다. 평안도 의주를 중심으로 한 중국 문화와 경제에 밝은 중인계급의 중국과의 교류는 자연스럽게 저들의 국제적 안목에 밝게 만들었고, 대원군의 쇄국정책이 가져올 민족과 국가의 고립무원의 장래를 염려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당시 만주 지역에서 스코틀랜드 선교사와 접촉한 사람들은 모두 평안도 의주 사람들이었다.

여기서 필자는 한국의 기독교가 미국 선교사의 한반도 입국으로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과 이 사실이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가를 심각하게 분석하지 않으면 한반도에 대한 기독교 전래의 근본적 동기와 계기를 잘못 이해하게 될 위험이 있음을 밝히고자 한다. 자기 민족을 새로운 생명의 길로 인도하기 위하여 나라 밖의 기독교를 자국의 정치, 법률적 명령을 어기면서까지 목숨을 걸고 가지고 들어 온 평안도 의주인들에 의해 이루어진 자국 선교의 역사는. 다른 나라에서의 서구 선교의 진입 역사와 구별하여 해석하고 설명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사실상 한국교회의 선교운동은 중국대륙의 한 변방에서. 그리스도를 영접한 나라 밖의 한국인들이 자기 조국을 위한 선교를 단행하기 시작한 그날부터 시작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 뜻에서 1870년대 최초의 신도들인 이응찬, 백흥중, 이성하, 서상륜, 김진기 등이 복음을 가지고 중국 국경을 넘어 압록강을 건넌 때가 한국인의 자국 선교운동의 시작이라고 해석되어야 한다. 이러한 해석은 사도행전 1장 8절의 뜻을 바르게 해석할 때 비로소 그 정당성을 인식할 수 있게 된다. ‘성령의 임하심’으로 배태되고 ‘권능 받음’으로 태어나서 ‘땅끝까지’ 가는 증인으로 성장한다는 성서적 원리가 한국에서 복음전래와 선교운동의 기원이 되었음을 확신하게 된다.

북방 중국 땅의 서간도, 북간도에 흩어져 살던 동족들에 대한 전도에서 우리는 디아스포라적인 민족선교의 모습을 본다. 사도행전 8장의 선교가 먼저 이방에 흩어진 동족들의 접촉에서 비롯된 것과 마찬가지로 한국교회의 민족선교의 초기과정도 이와 같다. 따라서 사도행전 시대와 동일한 성령의 역사로 해석되어야 한다.

병자수호조약이 맺어져서 중국과의 부끄러운 종속관계가 더해질 때부터 민란으로 경복궁이 불타고 이어서 임오군란이 일어나 나라의 울타리 군대마저 흩어져 가고 있던 1876년까지의 7년 사이에 1876년에는 의주 사람 이응찬과 백흥준, 이성하, 김진기 네 사람이 중국 땅 고려문 우장에서 세례를 받았고 1882년에는 이응찬, 서상륜, 이성하가 과김히 중국말 성경을 국내에 가지고 들어와서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을 번역하였다. 자국인에 의한 자국, 자민족 선교는 이렇게 해서 1876년으로부 1882년에 걸쳐 시작되었고 평안도 의즈와 황해도 소래에 동시에 최초의 교회가 세워진 것은 바로 그 다음 해이다.

한국 땅에 미국으로부터 선교사가 입국한 것은 자국인에 의한 자민족선교가 시작된 1876년으로부터 10년 후 그리고 한국어 성경번역이 있은 1882년으로부터 3년이 지난 1885년 9월이다. 이때에 아시아에 있어서는 국제적 역할관계가 급격히 변하고 있었다. 1895년의 청일전쟁은 일본으로 하여금 패전국 중국을 한반도에서 물러나게 하면서 1905년에는 세계 최초로 비서국 강대국으로 등장한 일본이 한반도에서 보호조약이라는 미명으로 서구 제국주의 식민지 무단(武斷)정책을 편다. 중국과 러시아라는 세계 최대의 국가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섬나라 일본의 군벌은 1910년 마침내 500년 지켜 온 이 왕조를 폐하고 합방이라는 이름으로 한반도를 아시아 북방을 향한 발판으로 만든다. 그러나 나라들의 흥망과 민족들의 대이동으로 엄청난 대변혁이 일어나고 있는 때에도 성령은 언제나 앞서가서 당시의 세계의 혼돈과 흑암이 지나간 다음의 세계를 위하여 새 길을 예비하시고 빛을 비추신다.
 

2) 일본제국 강점 초기의 외지 선교운동 (1905-1911)

일본군벌이 이조 왕국의 외교권 강탈을 꾀하려 들더 1901년 평양에 신학교가 세워진 것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필자는 여기서 민족의 외적 구속력은 국제적 강대세력의 흥정과 권모술수로 이루어질 수 있지만 나라 잃은 민족의 영혼과 그 내면적인 생명력의 축적과 보존은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져 가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1905년 8월 이씨 조선왕국의 외교권이 강탈되고 일본 제국주의 군벌의 식민통치 지배가 시작되지만 바로 그때에 ‘민족대부흥운동’이 시작되었고 2년 후인 1907년 9월 17일에는 평양신학교 제1회 졸업생 일곱 명이 목사 안수를 받고 ‘조선예수교장로회 독노회’를 조직한다. 최초의 목사로 창립된 서경조, 방기창, 한석진, 양정백, 길선주, 이기풍 등 일곱 명 중 두 사람은 즉시 선교사로 임명된다. 1907년 10월에 이기풍 목사를 제주도로 선교사로 파송하고 한석진 목사를 일본 동경에, 최관홀 목사를 러시아 시베리아 주재 선교사로 임명하여 1909년 각각 현지로 파송했다. 한국 기독교 전래의 초기의 민족선교는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내향적 선교에서 곧 이어 안으로부터 밖으로 뿜어내는 외향적 선교에로의 전환으로 쌍방 통행적 선교의 본을 보이고 있다.

이 초기 ‘민족적 외지선교운동’의 또 하나의 특성은 학생과 여성 평신도 지도자들이 동시에 참여한 선교였다는 사실이다. 1900년 초반의 한국 기독교의 지적(知的) 재산은 당시의 ‘고등 보통학생’들이었다. 대부분의 개척교회와 확장 주일학교는 고등 보통학생들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외지 선교운동’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1909년 평양 숭실학교 학생회는 당시 3학년생 김형제 군을 제주도 선교사로 파송하였다. 이와 동시에 평야 시내 여전도회 연합회는 이관선 권사를 택하여 제주도 주재 선교사로 파송했다. 이로서 목사와 학생과 여성지도자가 선교동역팀을 이루는 첫 케이스가 탄생한 것이다.

장로회에서는 박영일 장로를 선교사로 선정하여 한석진 목사와 동역하도록 1910년 일본 동경에 파송했다. 같은 해 김영재 목사를 북간도에, 김진근 목사를 서간도에 파송함으로서 한반도를 둘러싼 모든 나라 (일본, 러시아, 중국)에로 해외 거류 ‘자민족선교’의 불길이 산불처럼 번져 나갔다. 1905년으로 1910년에 이르는 이 기간이 망국의 수치와 나라 잃은 민족이 겪는 수모를 이겨 나가게 하기 위한 강력한 ‘성령의 선교’ 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이 5년 동안 교세의 증가는 10배를 넘어섰다. 파송된 선교사의 수는 계속 늘어났다. 1911년에는 임종순 장로를 일본 주재 선교사로 파송하여 당시 일본에 유학 중이던 조선 청년 학생들을 위한 사역에 한석진 목사와 동역하게 하였다.

1910년은 한민족의 출애굽과도 같은 민족의 북방을 향한 대이동이 시작된 해였다. 망국과 함께 삶의 터전을 빼앗긴 의식층 민족세력이 중국 동부지역 만주평원으로 대거 이동ㅇ한 것은 민족의 자유와 국권회복을 꾀하기 위한, 일제의 식민통치 거부의 강력한 의사 표출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시기의 중국의 중북부 만주 평원을 향한 민족의 대이동과 함께 조선예수교장로회 독노회에는 20여명의 평신도 지도자들을 동북 만주 지역에 파송하여 민족의 영혼들을 보호 육성하도록 하였다.

1910년 8월 이후 망국 1년도 못되어 중국의 만주 땅에는 위와 같이 20여명의 평신도 자원 전도자가 활동하여 한국인 민족교회는 한반도와 일본과 시베리아와 중국의 만주 땅 등 나라의 안과 밖을 연결하여 한 선교지역으로 묶어버렸다.
 

3) 민족독립운동과 타민족 선교운동 (1912-1937)

조선예수교장로회 독노회가 조직된 지 7년, 민족교회는 교세는 평안, 황해, 함경, 경기, 경상, 전라 등 전역에 노회를 조직하면서 1912년 9월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를 조직하기에 이르렀다. 장소는 평양여자성경학원 강당이었다. 창립총회의 집중사업은 ‘외지전도’와 ‘외국선교’였다. 총회는 창립기념선교사업으로 본격적인 외국선교를 전개하기 위하여 지금까지의 국내외의 자민족 선교에서 한걸음 나아가 중국인을 위한 타민족 선교를 착수하기로 결의했다.

선교지는 중국 산동성으로 정하고 내양현에 세 사람의 선교사를 파송하기로 결의했다. 선교비의 지원을 위하여 총회는 최초로 ‘감사절’을 제청하였다. 그리고 감사절 헌금은 전액을 총회 선교부로 보내어 선교사업비로 사용키로 하였다. 총회는 감사절을 음력 10월 2일로 정했다.

제5회 평양신학교 졸업생 김영훈과 제6회 졸업생 박태로, 사병순이 목사 안수를 받고 선교사로 임명되었다. 이 세 사람은 1913년 가을 북경을 거쳐 산동성 내향현에 도착했다. 이것이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시작한 최초의 타문화권 타민족을 위한 선교사업이다.

이들의 선교사업은 결코 평탄하지 않았다. 첫째로 이들은 중국어가 자유롭지 않았다. 둘째로는 중국이라는 세계 최대의 국가에 나라까지 잃은 망국인이 선교사로 왔다는 데 대하여 중국 지도자들이나 중국에서 활동하는 서구 선교사들은 결코 따뜻하게 대해주지 않았다. 그것은 매우 당돌하고 자기 신분을 모르는 주제넘은 조선사람으로 보였다.

중국의 지배와 영향 하에 종속되어 있던 소국인이 감히 선교사로 나타난 것은 결코 중국인들에게는 반가운 일이 아니었다. 그들은 적절한 영접도, 안내도, 주선도 받지 못했다. 한 해도 못되어 세 선교사 중 한 사람인 사병순 선교사는 중병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견디기 어려운 중국교회 지도자들의 무관심과 문화충격으로 박태로 선교사는 병에 시달리다가 빈사상태로 귀국하고 말았다. 김영훈 선교사는 부끄러운 귀국보다는 차라리 미국으로의 망명을 택했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선교부의 정책 부재의 세번째는 선교현지에 대한 사전 조사나 중국교회와의 협의없이 그러한 중대한 일들을 한국에 와 있던 ‘매퀸’과 ‘사무엘 마펫’ 등 미국 선교사들에게 맡겨두는 잘못을 저지른 데 있었다. 사실 서구 선교사들에게 있어서 자신들이 선교하고 있는 현지인들의 교회가 선교사를 파송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중대한 변혁이 아닐 수 없었다. 다시 말하면 한국교회가 선교사를 파송한다는 사실은 서구인들의 한국에서의 선교사명이 끝났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사실 서구 선교사들이 한국교회에 대해 가진 관심은 한국인들이 서구 선교사들의 도움이 얼마나 더 필요한가에 있었지 한국교회가 성장하여 서구 선교사들을 더 이상 필요로하지 않게 되는 것에 있지 않았다.

조선예수교장로교 총회는 1915년 선교부 서기였던 방효원 목사를 현지에 파송하여 실상을 조사, 보고토록 하였다. 방효원 목사는 위에서 필자에 언급한 것과 같은 내용의 보고서를 총회에 제출하고 자신이 직접 선교사로 나서 첫번째 실패를 승리로 바꾸어 놓기로 결심하였다. 이리하여 방효원 목사는 1917년 총회에서 홍승한 목사와 함께 산동성 내양현으로 파송되어 폐허가 된 선교현장을 재건하기 시작하였다.

다음 해인 1918년에는 박상순 목사가 계속 산동성으로 보충 파송되었다. 산동성에 선교부를 둔 서구 선교단체들은 나라 잃은 민족의 교회가 중국대륙에서 선교활동에 괄목할만한 성과를 내는 데 놀라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상동성 지역의 선교사업을 아예 한국교회가 전담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들이 설립했던 병원도 한국 선교부에게 팔기로 하였다. 이 병원은 적지 않은 시설이었으므로 거금이 있어야 양도받을 수 있었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는 이 사실을 전국에 알렸다. 마침내 평양에 있는 한 신도가 병원 매입에 필요한 전액을 부담하겠다고 나섰다. 그 때가 바로 3.1 독립만세 운동이 전국에 확산되고 있을 때었다. 또한 평양 여전도연합회는 중국 산동성 박상순 선교사의 주택비로 800원 헌금을 자청했다.

기미년 독립운동에 이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중국 상해에 수립되었을 때 이와 같은 큰 힘을 가진 중국 한국 선교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보호자일 수 밖에 없었다.

한국 선교사의 활약은 중국선교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같은 해에 시베리아 해삼위에 김현찬 목사가 선교사로 파송된 것이다. 함경도의 어느 가난한 사 형제는 해삼위 선교를 위해 300원을 헌금했다. 1920년에서 1922년 사이는 기미년 3.1 독립운동의 여파로 더 많은 민족이 시베리아로 이동하고 있었다. 시베리아는 마치 ‘조선 민족의 땅’처럼 되어 갔다.

1922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의 선교 예산 총액은 24,000원이 넘었다. 지금의 약 50억원에 달하는 거액이며 미화 700만불에 해당된다. 이러한 거액의 선교 예산은 말할 필요도 없이 한국교회 교인들의 희생적인 헌금 때문이었다. 한 예로 경상북도 경산군에 사는 김응서 집사는 1,000원 (지금의 2억원 상당)을 선교헌금으로 바쳤다.

1920년에는 경상노회로부터 경남노회가 분립되면서 일본 신호(神戶)에 선교사를 파송하였고 경북노회는 1921년에 이대성 목사를 중국 산동성에 선교사로 파송되었다. 방효원 목사가 중국선교사역 20년을 맞이하던 1937년에는 그 아들 방지일 목사가 한국 기독교 역사상 최초로 2대 선교사로 산동성으로 떠났다. 그는 중화인민공화국 모택동 주석에 의해 외국인의 선교가 금지된 후에도 10년을 더 버티다가 부임한지 20년이 되는 1957년 9월에 부산항으로 귀국하였다.

민족과 민중으로 이루어진 민족교회, 그리고 민족교회가 전개한 민족선교 나아가서 민족의 국가 회복의 열망을 타민족을 위한 초민족(超民族), 초문화(超文化)적 선교에로 승화시킨 한국 기독교의 자생적(自生的), 자주적(自主的), 외향성(外向性)은 한민족 본래의 내향적 성향(內向的 性向)과는 정반대의 새로운 민족성에로의 전향이었다. ‘성령의 권능’으로 인해 내향적 민족이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었고 민족갱신의 동력으로 나타난 것이다.

 

2. 종전 후의 선교운동과 국제적 협력
 

동서양의 강대국들은 제2차 대전의 전쟁 10년과 전쟁 후 10-20년 동안 세계질서를 크게 바꾸어 놓았다. 1937년 7월 7일 일본이 중국을 침공하면서 아시아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고 1939년 8월 1일 독일의 히틀러가 폴란드 국경을 넘으면서 유럽전쟁을 일으키게 되자 기독교 선교는 전쟁이 끝나기까지 전적 무능력의 상태에 빠져 버렸다. 1938년 마드라스 국제선교회의(IMC) 이후 1948년 암스텔담 세계교회협의회(WCC)의 탄생까지 서구선교회들은 구름 속에 가려진 태양처럼 힘이 없었다.

일제 말기의 조선반도는 교회존립 자체가 어렵게 되고있었지만 중국선교는 계속되고 있었다. 도리어 중국의 만주땅과 산동성 지역에서는 국내의 압박에서 약간의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이 때 중국의 교회는 한국 목사들에 의해 유지된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또 다른 의미의 디아스포라 선교가 계속되었다.

1948년 암스텔담에서의 ‘선교종식론’과 식민지 지역의 독립으로 인한 ‘선교사 철수론’이 대세를 이루고 있을 때 한국교회는 이북교회의 소멸과 남쪽에서는 홍수같이 밀려 내려온 이북 신자들의 ‘피난민 교회’로 또 다른 자민족 선교의 파도가 일어났었다. 서울의 20여 교회는 6.25 전쟁이 발발한 1950년에는 200여개를 넘어섰다. 20만의 신도가 곧 60만이 되었고 전쟁이 끝나자 어느 새 100만을 넘어섰다.

1945년부터 1960년까지의 15년간은 한국교회의 생동기라고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새로운 선교의 장이 열린 시기였다. 1956년에 시작한 장로교회의 태국선교는 최찬영, 김순일 두 선교사로 시작되었다. 비슷한 때에 중국 산동성 선교의 연장으로 장로교회가 계화삼, 정성원, 김응상 선교사가 대만에 파송되었다. 고신 측 장로교총회는 김영진 선교사를 대만 신죽으로 파송하였다. 필자는 1956년 8월 중국 산동성 선교사였던 이대영 목사를 모시고 미국 로드 아일랜드 프로비던스에서 열린 세계복음주의협의회 총회에 참석하고 세계선교 지도자들과의 교류의 길을 만들었으며 한국복음주의협의회를 창립했다.

국제선교협의회(IMC)가 WCC에 병합된 1961년에는 IMC 부회장이었던 김활란 박사가 이화대학교 선교회를 조직하고 전재옥, 조신자 외 한 사람을 파키스탄으로 교육선교사로 보냈다. 이어서 감리교회에서는 김성옥 목사를 말레이시아 사라왁에 보냈다.

필자는 전쟁의 폐허 위에서 겨우 살아남은 한국교회가 아직은 외국 선교단체들의 전후 원조에 의존해야 한다는 ‘의존심리’가 마음 밑바닥에 깔려있던 1960년 9월 미국에서 선교학을 전공하고 귀국하였다. 그리고 1961년부터 개교회 선교교육 운동부터 서둘렀다. 세계선교 불씨의 촉매역할을 시작한 필자는 매우 고달팠다. 1965년에는 김활란 박사와 한경직 목사를 중심으로 전국복음화운동을 전개하면서 조직위원장으로 전국을 누비며 선교의 불씨를 심었다.

또한 필자는 국제선교협력기구 이사회를 조직하고 1968년 10월에는 싱가폴에서 아세아 태평양 지역복음화대회를 주재하는 한경직 목사를 도왔다. 국제선교협력기구는 1969년에 최초의 한국복음화전도대회를 서울운동장과 장충체육과, 이화대학교 대강당, 시민회관, 그리고 영락교회에서 동시에 가지는 다원화된 선교대회를 여는데 성공했다. 이미 1968년부터 필자는 선교사 훈련기관으로 동서선교연구개발원 (당시의 이름 International School Mission)을 개원하고 비서구세계에서 최초의 선교사 훈련을 시작하였다.
 

1) 민족자생선교회의 형성

1961년 뉴델리에서의 국제선교협의회(IMC)의 소멸은 사실상 서구 선교가 사양의 길에 접어드는 전환점이라고 할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독립한 새로운 민족국가의 교회들은 식민정권 하의 서구 선교단체의 보호와 그늘 아래 안주하고 서식하던 지난 날의 행태를 계속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교회들은 급속히 민족교회로서의 자생의 길을 닦아야만 했고 제도적, 재정적 외세의존의 단절을 바라는 자민족 정권의 요구의 정당성을 거부할 수 없게 되었다.

1948년 암스텔담대회 이후 12년 비서구 세계의 교회들은 더 이상 종전(終戰) 이전의 서구 의존교회의 모습이 아니었다. 특히 아시아는 그러했다. 아프리카에는 60년대 초기까지 아직 독립된 국가를 가진 민족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아시아 대부분의 민족들은 이미 40년대 후반에 독립을 선언하고 자민족 중심의 국가 형태를 완성하였다.

부족사회의 형태를 벗어나지 못한 아프리카와는 달러, 아시아는 서구 문영의 역사보다 훨씬 길고 찬란한 운명과 역사를 지닌 민족 문화의 전통을 이어오고 있었다. 서구 식민 통치 100년으로 300년의 그늘에서도 민족들의 문화적 전통은 짓눌린 가운데에서나마 그 뿌리가 살아남아 있었다.

신생 전후 독립국가들의 집권자들과 민중 지도자들은 거의 예외 없이 민족주의자들이었다. 이러한 나라들에서는 더이상 기독교가 외래종교의 모습으로 민중 앞에 설 수 없게 되었다. 새로운 민족국가 앞에서 교회가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지날 날 지배자의 종교를 추종하던 노예종교의 탈을 벗어버리는 것이었다.

교회가 자민족 사회에 뿌리를 내리기 위하여 교회들은 지난 날의 구조와 제도를 스스로의 힘으로 해쳐가고, 민족의 교회, 민족으로 말미암는 교회, 민족을 위한 교회로 나라와 민족이 자신들의 종교로 인정할 수 있도록 거듭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서구인들은 이러한 일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세계교회’를 강조했다. 그러고 ‘하나의 교회’를 강조했다. 그러나 민족적, 문화적 동질성의 접착력은 ‘인류는 하나’ 하는 대의보다 훨씬 더 현실적이고 자신과 밀접하게 관계된 것이었다. 민족과 문화 단위의 교회 - 이러한 교회를 더욱 앞당긴 것은 분명히 1961년 뉴델리에서의 국제선교협의회의 해산이라고 할 수 있다.
 

2) 민족자생선교세력의 탄생과 서구 선교세력의 무관심

1960년대의 10년 동안 아시아의 7개국에서 민족 자생적 세계선교운동이 전개된다. 인도의 IEM(인도 복음주의선교회)와 FMPB(선교기도형제단), 인도네시아의 IMF(인도네시아선교회), 말레이지아와 싱가폴의 AEF(아시아선교회), 일본의 JOM(일본해외선교회), 대만의 COM(중국해외선교회), 홍콩의 SFWM(영량세계선교회), 필리핀의 PEM(필리핀복음선교회) 등이 그것이다.

한국은 이미 60년대 초기에 두 개의 비교파 선교단체가 형성되었다, 국제선교협력기구(KIM)와 이화여대 학생선교회가 그것이다. 전자는 필자가 1960년 미국 유학에서 귀국한 직후에 시작한 운동이고 후자는 국제선교협의회(lMC)가 해산된 후 협력회의 부회장이던 김활한 박사가 자신이 총장으로 있던 이화여자대학교 안에서 일으킨 운동이다.

전후 독립 국가 안에서 자생한 비교파적 선교운동은 민족교회 지도자들이 일으킨 운동이다. 1960년대 중반이후, 이들 선교운동을 주도한 민족교회 지도자들은 상호 방문의 기회를 통하여 비서구 선교 지도자들 상호간의 유대와 협력의 필요성을 인식하기 시작하였다.

필자는, 비서구 전후 독립국가 안에서 일어나는 자생적 선교운동이 기존 서구 선교세력의 방해와 반대에 부딪히지 않기 위하여 1966년으로 1970년에 걸친 5년 동안 서구 선교단체의 본부를 방문하고, 새로 일어나는 비서구 선교세력과의 상호 협력에 의하여 새로운 세계환경에 맞는 선교운동을 하자고 제안하였다. OMF(해외선교회, 전 중국내지선교회), TEAM(복음주의동맹선교회), C&MA(기독교선교동맹) 및 WPM(세계장로회선교회)는 필자가 접촉한 대표적 서구 단체의 이름등이다. 그러나 필자의 노력은 허사로 돌아갔다.

필자는 생각을 돌리기로 했다. 그리고 전후 독립국가들의 자생적 선교단체 지도자들의 단결과 협력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필자는 1971년 여름, EFMA(미국 복음주의 선교단체 협의회)와 IFMA(미국 초교파 선교단체 협의회)의 연례 공동정책 연구회의에 자진 참석했다. 이 회의는 위스컨신의 그리 레이크에서 열렸다. 그곳에서 필자는 발언할 기회를 얻었다. 그리고 “범아시아 선교지도자 협의회”를 1973년 8월에 한국 서울에서 개최하게 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러한 대회소집은 필자가 지난 5년 동안 힘써온 서구 선교세력과 새로 일어나는 비서구 선교세력, 그리고 새로 일어나는 비선교 세력 상호 간의 협력을 위한 노력이 수포로 돌아갔기 때문에 우선 아시아의 선교지도력 상호 간의 협력구조를 이루기 위함이라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300여명의 서구 선교지도자들은 거의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 때 필자의 발표에 관심을 보인 것은 단 두 사람 뿐이었다. 그것은 달라스신학교의 선교학 교수인 조지 피터스(George Peters) 박사와 풀러신학교의 랄프 윈터(Ralph D. Winter) 박사였다.

그러나 후에 가서는 그린 레이크 회의 주최측인 EFMA와 IFMA의 대표 Clyde Taylor 박사와 Jack Frizen Jr. 총무가 큰 관심을 보여왔고 풀러신학교의 선교대학원장 Arthur Glasser 교수와 Peter Wagner 교수가 정중한 서신을 보내어 필자의 운동에 관심을 표명했다. 필자는 즉시 서구 선교학자들과 아시아의 선교단체 대표들에게 “범아시아 선교지도자 협의회” 소집의 필요성과 그 계획을 알리는 서신을 발송했다.
 

3) 서울 ’73 : 비서구 세계가 주도한 역사상 최초의 세계선교회의

국제선교협력기구(KIM)는 1970년 8월 26일부터 30일까지 홍콩의 싱가폴 호텔에서 제1회 선교정책회의를 개최하였다. 동 선교정책회의는 아시아의 자생적 선교단체 지도자들이 조속한 시일 안에 한 자리에 모여 상호협력과 선교 동전선 구축을 위한 협의를 할 필요가 있음을 확인하고, 1973년 8월 “범아시아 선교협의회(All-Asia Mission Consultation)"를 소집할 수 있도록 준비하기로 결의하였다.

필자는 이와같은 경위를 당시 싱가폴에 사무실을 두고 있는 ’아시아 전도협력 사무실‘의 실행총무였던 Chandu Ray 감독을 방문하여 협의하였다, Chandu Ray 감독은 1971년 초 한국의 서울올 방문하고 한국 내의 선교 지도자들과 더불어 범아시아 선교협의회 소집의 준비에 동참하였다. 이리하여 필자는 1971년 9월 미국 Green Lake에서 열린 미국 복음주의 선교단체 협의회와 미국 초교파단체 협의회 공동정책 연구회의에서 이 "범아시아 선교협의회“의 소집계획을 공식 발표하게 되었던 것이다.

계속하여 필자는 1972년 7월부터 두 달 동안 인도네시아를 비롯한 아시아 6개국의 선교지도자들을 방문하여 ”범아시아 선교혐의회“ 준비를 마쳤다. 1973년 1월 10일로 12일까지 이 대회 준비위원회가 서울에 있는 국제선교협력기구 사무실에서 열렸다.

이렇게 하여 역사적인 비서구 세계에서의 자생적 기독교 세계 선교지도자들의 범아시아적 회의는 탄생되었다. 14개국에서 36명이 참석하였다. 동 협의회는 서구 국가로부터 옵져버는 제한된 시간에의 참석은 허락했지만 지정된 시간에 자신들의 준비된 논문만을 발표하도록 했다. 아마도 이것이 세계선교운동에 서구의 지도자들이 초청을 받고도 주요한 본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고 로비에서 서성대며 기다려야 했던 최초의 역사적 사건을 만들어낸 회의였을 것이다. 참가자들은 서구 선교의 공은 인정하지만 잘못과 과오를 지적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시아의 교회가 아시아인 선교사를 서로 보내고 받는 일을 더욱 강화하고 발전시키는 데 힘을 합하기로 결의하였다.

1974년까지 최소 200명의 아시아인 선교사를 가장 필요하고 적절한 지역에 파송하는데 협력하기로 하였다. 아시아인 선교사들은, 성령의 능력을 힘입은 전도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로부터 전도의 임무를 수여받은 하나님의 에이전트라는 것과 복음주의적 교회를 심는(세우는) 것을 가장 기본적이고 우선적인 책임으로 할 것을 결의했다. 계속위원회(Continuation Committee)가 조직되었고 필자는 계속위원회의 총무와 회계로 선출되었다. 협의회는 2년 이내에 〈아시아선교협의회〉 창립총회를 소집하기 위하여 헌법기초위원회를 선정하고 선교사의 훈련과 선교정책과 전략을 연구하기 위하여 동(東)과 서(西)가 서로 협력할 수 있는 ‘동서선교연구개발원(East-West Center for Mission Research and Development)’을 서울에 설립하기로 결의하고 그 진행과 관리를 국제선교협력기구 이사회에 일임하기로 결의하였다.
 

4)  AMA’75 : 단절과 계승과 단결을 통한 선교의 새 세력 구성

70년대에 들어서도 서구 선교의 진보, 보수. 두 세력은 서로 상반된 자기 길을 가고 있었다. 방콕에서는 1973년에 ‘오늘의 구원’을 외치며 ’빵과 일자리‘를 외치는 선교가 강조되고, 1974년 로잔에서는 ’그의 음성을 듣게 하자’는 ‘귀와 음성’의 복음을 강조하고 있을 때, 아시아의 선교지도자들은 1973년 서울에 모여 새로 얻은 독립을 위한 민족의 국가건설이 민족들의 구원운동을 통하여 나라의 건설이 바르게 이루어지기를 염원하면서 서구 의존의 옛 구조, 옛 관계와의 과감한 ‘단절’을 강조하고 있었다. 서구 식민 정권 하의 종교로서의 피선교지 교회가 서구 선교와 단절이 없이는 절대로 그 민족의 구원을 위한 교회로서의 위치를 찾을 수 없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서구인들은 이 단순한 논리를 모르고 있었다.

한편에서는 ’빵과 일자리‘와 ’임금‘의 해결로 선교를 대신한다면 서구 선교의 설자리가 남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다른 한쪽에서는 그러한 것들은 하나님 나라의 일이 아니므로 다만 모든 민족은 말씀에만 귀를 기울여야 하고 자기들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그들이 듣게 하면 된다고 주장했다. 민족들이 되찾은 ’자주‘와 ’독립’이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는지 그들은 몰랐다. 서구인들 연에서 보연 자기들은 잃었고 빼앗겼으며, 새로 독립한 나라의 민중들은 다시 되찾은 권리와 자유를 누릴 자격이나 그것을 간직할 능력도 없을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서울’73>은 서방 세계에 대하여 아시아 민족들의 마음과 감정을 분명하게 전하는 기회가 되었다. 필자는 개회 기조강연에서 ‘서구 선교가 새로운 세계 역사 앞에서 자기가 지켜야 할 본래의 위치로 돌아가지 않는 한 제3세계 신생 독립국가들의 민족들과 그들의 빈축 선교지도자들에 의하여 단절과 거부를 당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였다. ‘성서적 선교 원리의 재발견과 그 올바른 전승을 통하여 아시아의 교회가 자기 민족과 문화적 토양에 뿌리를 내린 산 종교가 되어야만 진정한 자생적 선교가 시작된다”고 강조했다. 그러고 찍어다가 화병에 꽂은 꽃과 같은 외래종교는 사람의 눈을 즐겁게 할 수는 있을 지 몰라도 생명을 번식시킬 수 있는 뿌리가 없어 곧 시들어 버린다고 경고했다. 그리고 단결과 협력을 강조했다. 서로 남의 밭을 매고 서로가 남의 일터에서 함께 일하는 아시아인적 협동과 원시 기독교 공동체를 재생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1973년 8월 30일에 구성된 〈범아시아 선교협의회〉 계속위원회는 9월 1일 첫 위원회 협의기구로서 국가별 선교협의회를 조칙토록 격려하기로 했다. 1974년 4월 16일 제2차 위원회가 홍콩에서 소집되었다. 제3차 계속위원회는 1974년 8월 23일 스위스의 로잔에서 모였다. 그리고 헌법 초안이 심의되었다. 역사적인 ’아시아 선교협의회 창립총회(Inaugural Convention of the Asia Missions Association)’가 1975년 8월 28일 오후 2시에 개막되었다.

초대 회장에는 중국 산동성 출신 동근휘 박사가 선출되었다. 부회장에는 인도네시아의 Petros Octavianus 목사가 선출되었고 필자는 대회에서 사무총장으로 선출되었다. 서구교회와 선교단체들은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그 역사적 의미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창립총회가 발표한 〈기독교 선교에 관한 서울선언(Seoul Declaration on Christian Mission)>이 영문과 독일어. 스페인어로 번역되면서 선교학자들의 큰 관심을 끌게 되었다.

〈서울선언〉은 먼저 서구 선교의 과거 역사에 대한 재검검과 과오에 대한 회개를 요구하고 있다. 그리고 전후 30년 동안 계속되고 있는 서구 선교의 동향에 대하여 신랄하게 비난했다. 서구 개신교 선교 200년의 결과를 보아 세계 선교를 그들에게 맡겨둘 수 없게 되었다고 선언했다. 아시아를 비롯한 제3세계에서 일어나는 새로운 선교세력을 보호 육성하기 위하여 동과 서가 손을 잡아야 한다고 제안했다. 서울선언은 서구 선교 지도자들에게 이렇게 경고했다. 더 이상 당신들 스스로가 원하는 길로 가지 마시오. 더 이상 그 보기 흉한 경쟁을 일삼지 마시오. 아시아에서 일어나는 새로운 선교 지도력과 손을 잡고 일하기를 시작하시오 지구상 동서남북의 모든 민족과 나라들이 함께 공동의 선교전선을 구축해야만 합니다.’

서구인들의 의도적인 무관심에도 불구하고 서울선언은 60년대와 70년대에 발표된 문헌 중 가장 분명하고 단호한 기독교 선교의 새 역사 창조를 위한 문헌으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

 

II. 전망 (Prospectives)

 

1. 새 시대를 위한 제3세계 선교의 새 세력
 

산모의 피흘리는 고통없이 새 생명을 탄생되지 않는다. 태어난 새생명은 7일이 지나고 100일이 지나면서 성장의 속도와 변화가 점점 빨라진다. 돐이 지나면 제 발로 일어서고 걸음걸이를 배우기 시작한다. 아기의 성장에 따라 부모의 역할이 달라진다. 그러고 아기가 성장한 후에는 부모보다 힘도 강해지고 지혜도 능력도 앞서게 된다. 오늘의 부모는 어제의 어린 아기였던 것처럼 오늘의 어린 생명도 성숙한 부모가 되는 것이 생명의 법칙이다. 그런데 서구 선교 세력은 이러한 생명의 법칙을 무시하여 온 것으로 보인다. 나고, 늙고, 병들고, 축는다는 이 법칙은 역사의 법칙이기도 하다고 토인비는 말한다. 서구 선교세력은 자신들이 너무도 낡아버렸다는 것과 쇠하고 병들어 가고 있다는 사실을 잘 모르고 있는 듯하다. 더욱이 자기들이 기르던 이들 교회들이 성창하여 이제는 성숙해져 어른이 되었고. 또 다른 민족들 속에 새로운 교회를 탄생시키는 젊고 능력있는 부모로 변해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는 듯하다.
 

1) 새 선교세력으로 성장한 선교의 신생아들

60년대에 들어서면서 젊고 발랄한 새 선교세력이 아시아에서 태어날 때에도 전통적 서구 선교세력은 어린아이 같은 아시아 교회가 어찌 선교의 어머니가 될 수 있을 것인가고 믿어주지 않았다. 그러나 70년대의 중반에 접어들면서 아시아에서 태어난 선교의 신생아들은 걷기를 시작하고 힘을 쓸 수 있게 성숙해 가고 있었다. 1968년 싱가폴에서의 〈아시아 태평양 전도대회>, 1973년 서울에서의 〈범아시아 선교 지도자 협의회>, 1975년 서울에서의 〈아시아 선교협의회 창립총회>, 1978년 싱가폴에서의 〈범아시아 선도지도자 대회〉 동으로 대표되는 70년대의 10년은 세계 선교세력의 주력이 유럽과 아메리카로부터 태평양을 건너 방대한 아시아 대륙과 섬들로 옮겨지는 엄청난 전환기적 10년이라고 보아야 한다.

미국의 가장 유력한 선교연구기관 중의 하나인 MARC(Mission Advanced Research & Communication Center) 는 1976년 8월, <아시아 선교단체들: 세계 복음화를 위한 새로운 조직〉이라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 보고서에 의하면 1976년 아시아인들에 의한 선교단체 75개를 확인하였다. 또한 이 보고서는 그 중 53개의 선교단체에 속한 선교사의 수를 1,293명으로 조사하였다. 그리고 이 조직들은 한국, 일본, 인도네시아, 싱가폴. 인도. 홍콩, 대만, 필리핀 등 8개국에서 자생한 아시아인들의 선교단체라고 정의하였다.

O.C. Ministries의 회장인 Lawrence E. Keyes는 1983년에 〈제3세계 선교단체 연구보고서〉를 발표했다. 그의 보고서에 의하면 1980년 현재만 해도 368개의 선교단체가 13,000명의 선교사를 파송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1989년 이 보고서의 계속보고서로 발표된 Larry D. Pate의 〈제2, 제3세계 선교단체 연람〉에서는 1988년 현재 아시아 선교단체 587개, 아프리카 선교단체 338개, 라틴 아메리카 선교단체 153개, 대양주 선교단체 19개로 나타난다. 그러고 제3세계 선교사의 수는 아시아 선교사 17,299명. 아프리카 선교사 14,189명, 라틴 아메리카 선교사 3,026명, 대양주 선교사 610명으로 조사되었다. 이 조사에서 나타난 제3세계 선교세력의 폭발적 성장은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가 꼭 같이 약 300%에서 350%의 고도 성장을 나타내고 있는 것을 알고 있다.
 

2) 제3세계 선교운동의 주역들

80년대에 들어서면서 제3세계 선교운동을 이끌어가는 주역들이 뚜렷하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남아시아에 있어서는 인도와 인도네시아 두 나라가 선두에 나서고 있었고, 동북아시아에서는 한국과 일본이 아시아 지역선교의 범주를 넘어 아프리카와 라틴 아메리카로 뻗어가면서 사실상 선교사의 질과 선교재정의 크기에 있어서 유럽과 북미의 수준에 바짝 따라 붙고 있다. 반면 중국도 나름대로 하나의 선교영역을 개발하고 있었다. 중국 본토의 11억 중국인과 전세계에 흩어져 사는 1억이 넘는 다국적 중국인을 한데 묶는 세계 중국인 공동체가 ‘중국인 세계복음화 운동본부’라는 거대한 조직망을 구축한 것이다.

아시아에 있어서 이 세 개의 새로운 선교세력의 삼각구조는 아시아의 종족-문화-지리-기후-사회발전 양상에 따라 자연스럽게 구분된 세 개의 블럭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과 일본은 제3세계 선교의 가장 수준 높은 인적 자원과 희생적 청지기 정신으로 연단된 경쟁력을 가지고 아시아와 제3세계 선교의 동력원 노릇을 할 수 있는 두 개의 높은 산처럼 우뚝 서 있다. 어쩌면 하나는 시내산 같고, 다른 하나는 갈멜산처럼 새역사의 분수령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국은 신학과 선교와 교회성장의 휘어나 지도력의 풀(pool)로 나타나고 있다. 한국의 선교지도력 집단은 크게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 한국의 세계 선교운동은 어디까지나 교회가 그 근본이 되고 있다는 특색을 잊어서는 안된다.

첫째로 1880년대 초부터 제2차 세계대전까지 한국의 선교운동을 주도한 것은 장로교 총회선교부였다. 한국에서는 교단 총회를 떠나서는 선교를 생각해 본 일이 없었다. 그 전통은 1960년대 이후 1990년에 이르는 30년 동안에도 꾸준히 드러나고 있다. 현재 대표적인 장로교회의 세 개의 교단, 곧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의 합동, 통합 및 고려 등 세 개의 장로교 선교부는 한국전쟁이 끝난 1955년 이후 줄곧 저들의 선교영역을 확대하여 한국선교사 전체 수효의 과반을 차지하고 있다. 이 세 개의 교단은 상당한 수준에 달하는 선교 연구소와 훈련원을 교단 신학교와 협력하여 운영하고 있다. 장로교회의 적은 분파들인 개혁파, 합동개혁파 등의 선교열 역시 자체 교단의 크기에 비해 놀랄만한 수준으로 높아지고 있다. 다른 군소교단들의 선교사 파송운동 역시 아시아의 다른 교회들에 비해 훨씬 앞서고 적극적이다.

둘째로, 한국의 선교운동의 또 하나의 세력권은 서구 선교단체의 한국지회들을 통한 초국가적 비교파 선교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서구의 대표적인 복음주의 선교단체들과 동역관계 협약을 맺으면서 다국적 선교세력의 발판이 한국에 구축되어 새로운 형태의 서구 종속적 선교지도력이 형성되고 있다.

셋째로 일어나는 선교 지도력은 순수한 한국 자생적 신앙 선교단체들의 출현이다. 이러한 세력들도 몇 개의 유형으로 구분된다.

일본은 알차고 실속있게 구체적으로 선교의 현장 세력을 착실하게 확대해 나가는 아시아에 있어서의 북구형(北歐型) 선교구조를 형성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오야마 레이즈, 오쿠야마 미노루 등은 1960년 이래 선교현장의 오랜 경험과 국내에서의 선교사의 육성과 선교자원을 개발한 대표적인 두 지도자들이다.

아프리카와 라틴 아메리카의 선교 지도력은 훨씬 더 서구 의존적 혹은 종속적 위치가 남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라틴아메리카에서 가장 프로테스탄트 세력이 강한 브라질은 몇 사람의 두드러진 선교 지도력을 가지고 있다. 그 중 하나는 안디옥선교회(Anthioch Mission)를 조직한 조나단 산토스(Jonatan Santos)이고 다른 하나는 쌍파울로의 침례교회 목사인 에디슨 카로스(Edison Caros)이다.

이들은 모두 제3세계의 어느 선교단체와 운동보다 훨씬 더 북미의 교회와 선교단체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다.

또 다른 하나는 아르헨티나 출신의 선교사로 과테말라에서 활동하던 루이스 부시(Luis Bush)를 들 수 있다. 그는 1985년. 미국의 재력으로 제3세계의 인력을 직접 지원하는 정책을 개발하여 은 미국의 선교단체인 CNEC(Christian Nationals Evangelistic Commission)의 국제회장으로 선출됨으로서 제3세계 출신으로는 최초로 미국 선교단체의 지도자 위치에 앉게 된 사람이다. 그는 1988년 이후 CNEC를 국제동반자선교회(Partnership International)로 개명하고, 서구와 비서구 세계의 ‘선교동반자 관계’를 강조하는 정책을 강력히 밀고 나가고 있다.
 

3) 제3세계의 선교를 위한 몸부림

제3세계 선교 세력의 폭발적 성장 추세에 대하여 홍콩선교단체협의회(Hong Kong Association of Christian Mission)의 총무 목걸정(穆杰靜. Edmond Mok)은 다음과 같이 매우 흥미로운 대조표를 발표했다.

연도

1800

1900

1979

1985

서방세계

99%

91%

64%

34%

제3세계

1%

9% 

36%

66%

그는 또한 서구 기독교 성장세가 1971년에서 1985년의 10년 사이에 1.3% 성장에 그친 방면, 제3세계 기독교 성장률은 6.7%로 다섯배의 고도성장을 이루고 있다고 분석했다.

 

2. 선교의 다원성과 창출의 원동력으로서의 제3세계
 

선교가 성서적으로는 천국복음의 확장원리를 생물학적 문화확산의 원리(마 13:31-32)와 화학적, 물리학적 팽창원리(마 13:33)에서 찾게 된다.

사도행전 6장의 ‘조직원리’와 8장에서의 ‘분산(分散)활동의 원리’, 9장에서의 ‘선택원리’, 10장에서의 구원계획의 모든 민족에게 대한 ‘평등원리’, 13장에서 보는 선교사역의 교회사역과의 ‘분리원칙’ 등은 선교의 다원화(多元化, Multi-Origin) 원리의 기초가 된다.

중세의 십자군 선교가 추상적 ‘성지회복’을 위한 ‘왕권선교(Royal Mission)’라고 한다면 근대 카톨릭 선교는 교황권력의 반항 이탈 세력으로서 수도원 세력을 교권 확장욕과 근세 유럽 제왕들의 국력팽창주의를 등에 업은 ‘정복주의 선교(Triumphal Mission)’라고 할 수 있다.

이와 함께 1850년대 이후 프로테스탄트 선교의 특성은 지배 민족이 식민지 노예 민족을 개종을 시키는 식민지 선교, 즉 유사식민 선교 또는 ‘노예선교’ 였다는 비판을 면할 수 없다. 콘스탄틴 대제 이후 신성로마제국과 교황과 근데 제국주의 유럽 제왕들의 권력 등과 서구 선교가 유착되어 오는 동안, 그리고 제국주의 식민 정권과 서구 선교가 상호 유착하여 타민족 사회에서 활동하는 동안 분화(分化)와 확산(擴散)과 팽창(膨脹), 분산(分散)과 복합(複合)과 평등(平等)의 성서적 선교원리가 소멸되어 갔다.  

서구 선교의 종식을 선언한 1980년의 국제선교협의회(ICM)의 해산은 새로운 선교의 규범을 성서에서 찾도록 성령의 강권을 받는 새로운 계기가 되었다. 1960년대 이후 모든 민족으로부터의 선교운동이 일어나서 선교운동의 다원화 현상이 부상되면서 선교 주도세력이었던 서구 교회와 피선교 지역이었던 비서구 교회의 역할 전도(Role Regression)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시대를 필자는 ‘변화의 시간(Changing Time)’이라고 정의한다. 입장의 변화의 시간이 먼저 오고 나서 역할의 변화의 시간이 잇따라 온다. 이에 따라서 지도력 교체의 시간이 오게 되고 새로운 질서의 시간이 전개된다. 1990년대는 마침내 1960년대에서 70년대와 80년대의 30년이라는 한 세대의 역사가 새로운 사고에 의한 새로운 질서를 정착할 때까지는 10년의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든 민족으로부터 선교의 물결이 동시파상형(同時波狀型)으로 끊임없이 밀어부치게 되면 결국 모든 민족은 선교의 큰 물결 속에 함몰될 수 밖에 없게 된다. 여기에 2000년대를 향한 ‘모든 민족으로부터 모든 민족에게로’의 새로운 선교전략의 긴급성의 이유가 있다.
 

1) 모든 민족을 위한 모든 민족의 선교전략

선교하는 민족과 선교의 대상인 민족 간의 관계가 상하의 관계가 아닌 서로의 관계로 변해야 한다. 복음을 주는 자나 받는 자가 똑같이 선교의 주체가 되게 하는 길을 찾아야 한다. 이것을 ‘모든 민족을 위한 모든 민족의 선교전략’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서구식 사고와 아프리카식 사고의 차이, 그리고 북방 민족들과 남방 민족들 사이의 사고방식의 차이는 결코 우열(偶劣)의 관계여서도 선악(善惡)의 관계여서도 안되고 그 어느 하나를 선택하고 다른 것을 버려야 하는 관계여서도 안된다. 모든 민족의 문화와 사고의 가치는 동등하게 존중되어야 하며 자기 사고와 자기 방법이 다른 한편에 절대로 강요되어서는 안되는 것이 모든 민족을 위한 모든 민족의 선교전략이다.

아프리카인들이 한 푼의 물질도 소모하지 않고 성취할 수 있는 일이 서구인들에게는 엄청난 기술과 자원을 소모한 후에나 달성되는 일들이 있다. 반대로 비서구 사회에서 많은 인력과 물질을 소모해도 성취되지 않던 일이 서구 문명의 기술을 가진 단 한 사람에 의하여 달성된 일도 있다.

이와 같이 모든 민족의 선교전략은 모든 민족들과 더불어 상호보완관계에 있는 것이지 승패(勝敗)의 관계나 명령과 복종의 관계에 있지 않다. 선교전략은 선교의 효율성을 위한 것이기는 하지만 선교전략이 전통적 선교 세력의 전유물(專有物)이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모든 민족이 함께 수립하는 공동의 전략이어야 하며 그것은 한두가지 전략으로 집약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전략들의 집합(집합)이라야 한다. 아시아인의 전략과 아프리카인의 전략과 라틴 아메리카와 유럽인의 전략이 다르다. 단일 전략은 다양한 선교대상 중에서 일부에서만 성과를 거둘 수 있다.

국제연합(UN)이 모든 민족의 정치적 광장인 것처럼 모든 민족의 선교전략을 위하여 모든 민족의 사고(思考)가 남김없이 동원되고 분석될 수 있는 광장을 마련해야만 한다. 민족 상호의 특성을 이해하고 그 차이점을 가지는 가치를 인정하지 않을 때에는 공동의 선교전략은 창출되지 않는다.

철학의 영역이 종교의 영역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연과학이 사회과학의 사고를 바르게 해석하지 못하는 것처럼 모든 민족의 사고와 지식의 방법은 모두가 동일할 수 없다. 그것을 참으로 깊게 이해한다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교는 그러한 노력의 가치를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된다. ‘모든 민족으로부터 모든 민족에게로’의 시대가 가지는 기본적 숙제는 다원성(多元性)과 다양성(多樣性)에 어떻게 불편없이 선교의 전략에 적용할 수 있는가를 푸는데 있다.
 

2) 선교의 다원성과 다양성의 조정원리

‘모든 민족에게서 모든 민족에게로’라는 모토 하에서 새 시대를 위한 선교의 최대의 과제는 다원성과 다양성을 어떻게 조정하느냐에 달려 있다.

.a) 조정능력과 효과적이고 신속한 커뮤니케이션 조직망의 개발은 필수적이다. 선교본부와 선교현지의 개념이 달라지고 통신과 여행시간이 단축되고 선교재정의 계산과 응용조직이 첨단화 되어 있으면서 문명혜택이 더딘 지역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접근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는 새로운 첨단기술을 선교에 응용하려고 하는 이 시대가 풀어야 할 긴급한 과제이다.

b) 선교임원의 지적 수준의 격차와 선교재정 공급능력의 격차를 조정하는 것 역시 또 하나의 과제이다.

c) 모든 선교사들에게 전 세계 선교정보를 공급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d) 또한 선교사의 지적 발전과 능력개발을 위한 공동의 기구가 절실하다.

e) 선교사 가정의 보호와 자녀의 교육을 위한 협력구조는 지극히 인간적이면서도 가장 근본적인 문제에 속한다.

f) 선교사의 질병과 사고의 은퇴와 사망 등에 대한 공동 안전대책을 수립하는 일은 피할 수 없는 책임이다.

g) 선교인원의 계속적인 증원과 이들의 광범한 상호교환제도의 개발 역시 선교의 필수요건이다.

이러한 다양한 요구는 개개의 선교단체 또는 몇 개의 단체 간의 협력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다. 그래서 필자는 1973년 이래 ‘선교협력과 조정기능을 가진 새로운 선교구조’를 계속 제창해 왔다. 이러한 협력구조가 이루어지기까지는 먼저 상호신뢰의 분위기 조성이 필요하며 이러한 상호신뢰는 대화와 협의의 기회가 계속됨으로 마련될 수 있다. 개인주의적 의식보다는 하나님 나라를 위한 선교공동체 의식이 ‘모든 민족으로부터 모든 민족에게로’ 향하는 시대의 기초원리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다원성과 다양성의 조정을 위한 구조는 다원조직이라야 하고 또한 독립적 기능을 보유하면서도 권리와 책임을 차별없이 공유하는 통합구조(Integrative Structure)를 이루어야 한다. 구성원 각자에게 권한이 위임되고 그 위임된 권한 안에서 상호의 책임을 위임하는 위임(Delegation)과 분담(Assignment)의 원칙이 적용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다원성과 다양성은 자칫 무질서와 혼란, 경쟁과 대결을 낳기도 하며 진위의 혼미를 가져올 수 있다. 이러한 범세계적, 범민족적, 다원적 선교시대에 무질서, 독점과 중첩, 경쟁과 대결, 낭비와 결핍을 극소화 시키면서 사람들 간의 사랑과 신뢰에 의한 자율적 조정능력을 배양할 수 있는 합의를 표출하는 것이 다원화된 시대에 다양한 선교를 조정하는 열쇠라고 할 수 있다.
 

3) 선교의 다원성에 피해야 할 요소들

선교역사에서도 새로운 세력들이 시작될 때는 이미 있던 세력들의 저항과 무관심과 불인정의 불행한 과정을 겪어왔다. 서구 선교학자들이 신생 독립국가에서 일어나는 자생적 선교운동을 ‘토착민들의 선교(Native Mission)’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평가하던 시대는 지났다. 1971년 이후 증가되는 서구 선교기관들의 연구조사가 전에는 토착민들의 선교활동에 불과하다고 보던 활동들이 이제는 서구 선교기관들이 감당하기 어려운 부분을 담당하는 대체세력으로 등장한 것이다. 이러한 서구 선교기관들이 제3세계 선교운동을 바르게 평가하지 못한 것은 편견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기존의 서구 선교기관들이 선교의 다원화 현상을 어떻게 인식하느냐 아니냐에 따라 새로운 선교시대에서 서구 선교기관들의 위상이 결정될 것이다.

서구 선교기관들이 세계를 자기들의 독점적 선교지역으로 보고 제3세계 선교운동을 자기들의 분신 정도로 보고 자기들의 일부로 흡수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위험한 발상이다. 제3세계 선교세력을 육성하는 것은 서구 선교기관들의 주도 하에서가 아니라 제3세계 선교기관들의 주도 하에 이루어져야 한다.

반면 자생적 제3세계 선교단체들은 선교사의 훈련이나 선교재정의 모금, 선교단체의 운영방식에서부터 현지 사역의 형태에 이르기까지 각기 자기 민족 특유의 사고, 관습, 제도를 유지하면서 다른 민족들과의 차이를 이점(利點)으로 삼아 다른 민족의 선교단체들과 복합적 보완관계를 유지하도록 힘써야 한다. 즉 제3세계 선교단체들은 스스로 자생성(自生性)과 자율성(自律性)과 자립성(自立性)을 유지하면서 다른 민족의 선교단체들과 협력구조를 이루어 국제조직의 일원으로 그 위치를 지키도록 해야 한다. 이는 각 민족들로 기존제도가 갖지 못한 특이한 선교원리와 방법들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민족으로부터 모든 민족에게로’ 확산되는 새로운 시대의 선교는 성서적 기본원리 위에서 각 민족마다의 상이(相異)한 선교양식(宣敎樣式)과 선교방법을 존중하면서 모두가 힘을 합칠 수 있는 국제적 협력구조를 이루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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