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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한인세계선교대회 > 둘째날 > 주제강연

 [둘째날] 주제강연 - "세계선교의 역사적 조명과 방향제시"

 

김의환 / 나성한인교회 담임목사, International 신학교 교장, 한인세계선교협의회(KWMC) 의장

 
 

KWMC1992 제2차 한인세계선교대회 > 둘째날 1992년 7월 28일(화)

주제강연 - "세계선교의 역사적 조명과 방향제시"

 

서언

기독교는 역사적 인물로써 가이사 아구스도 때에 탄생하여 본디오 빌라도 치하에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 사역, 그리고 사역에 기초를 둔 역사적 종교이다. 그리스도가 세우신 교회 또한 오순절을 기해서 시작하여 그리스도의 재림까지 지속될 역사적 기관(Historical Institution)이다. 교회가 존속하는 동안에 교회에 부여된 가장 중요한 임무는 복음을 온 천하에 전파하여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는 것이다. 이 가장 중요한 임무 수행인 세계선교의 사역을 위하여 우리 모두는 이 아침 이곳에 함께 모인 것이다. 이 시간 나는 「세계선교의 역사적 조명」 이라는 제하에 세계선교의 역사적 고찰, 현재의 상황 분석을 통하여 세계선교의 방향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
 

1. 세계 선교의 역사적 고찰

1) 종교개혁 이전 (초대교회 - 15세기)

가. 초대 선교운동

바울의 필생의 선교운동은 이미 사도시대에 복음의 메아리가 로마의 전역에 울려퍼지게 하였다. 사도시대 이후 계속되는 박해 속에서 복음은 여러 부족들에게 지하수의 흐름처럼 로마에 흩어진 여러 부족들에게 은연히 전파되었다.

가장 두드러지게 복음이 전파되고 교회가 부흥된 곳들을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로마 : 코넬리러스 감독 때에는 로마의 신도수는 수십만을 넘었고 46명의 감독과 백명이 넘는 교역자들이 선교하고 있었다. 3세기 중엽까지는 약 100명이 넘는 감독들이 있었고 꾸준한 성장이 있었다.

고올 : 2세기 중엽에 벌써 리용과 륀지방에서 교회가 크게 번창하였고 3세기 중엽에는 7명의 선교사가 로마로부터 파송되었다.

칼타고 : 220년에 칼타고 대회가 열릴 때에 70명의 감독이 참석하였다.

스페인 : 바울이 처음으로 이 지역에 선교했을지도 모른다 (롬15: 23). 3세기 중엽에는 상당수의 교인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르메니아 : 전설에 의하면 그레고리라는 선교사에 의하여 처음 복음이 전파되었다, 박해 중에도 그의 선교는 크게 성과를 거두어 터리다태스왕을 신앙으로 인도하고 천 부족이 왕을 따라서 기독교 신앙으로 돌아왔으며 그레고리는 감독으로 추대되었다.

인도 : 열두 제자 중 하나였던 도마에 의하여 복음이 전파되었다고 하며 6세기에 인도 교회가 건재한 사실을 볼 수 있다.

나. 중세기의 선교운동

중세기에 있어서 우리는 초기 중세의 영광을 그 선교열에서 볼 수 있다. 물밀듯 남쪽으로 밀려오는 북방의 만족을 복음으로 막아 그들을 복음화 시켰을 뿐만 아니라 멀리 선교사들을 파송하여 선교운동에 힘썼다.

(1) 영국의 개종

교황 그레고리 1세의 파송을 받은 Canterbury의 대주교 어거스틴은 596년에 30여명의 수도사들을 데리고 영국으로 건너가 영국 켄트와 에데버트를 전도하여 597년 2월애 세례를 받게 하고 점차 온 나라를 기독교로 개종케 하였다.

(2) 대학선교

* 영국에서 일어난 성공적 선교의 결과는 대륙에서도 나타난다.
* 아일랜드와 아이오나섬은 유럽 선교의 중심지가 되어 많은 선교사들을 보냈다.
* 게르만 민족의 선교를 위하여 아일랜드로부터 많은 선교사가 파송되었다.
* 점차적으로 고올 지방과 프리지아 지방이 선교화 되었다.
* 8세기에 뛰어난 선교업적을 남긴 선교사는 윈프리드(Winfrid 680-754)였는데 그는 뛰어난 지도력과 조직력으로 흩어진 지역교회들을 연합시켜 수도원을 세우고 일군을 양성하였다. 눈부신 선교업적은 그의 탁월한 선교전략에서 볼 수 있는데 그는 먼저 왕과 지역의 유력자들에게 먼저 전도하여 전 부족의 일시 개종에 힘썼다. 그는 그의 성공적 사역 도중에 그의 제자에게 그의 일을 물려주고 50여명의 제자들을 데리고 새선교지를 찾아 나서고 전도하던 중 이교도들의 습격을 받아 755년 7월 순교하였다.

다. 중세기 후반기의 선교운동

타락과 사치의 깊은 장에 빠진 중세교회의 영적인 퇴조기에 수도원들의 개혁운동이 중세 후반기 교회의 활력소가 되고 또한 선교의 명맥을 유지케 하였으나 전반적으로 선교역사로서는 매우 침체된 기간이었다.


2) 중교개혁 이후 (16-17세기)

흔히 개혁자들을 통한 종교개혁의 강한 영향이 개신교내의 선교에의 필요성과 관심을 불러 일으켜 그당시 발달된 항해술을 통한 새로운 식민지개척과 무역의 활발한 교류를 선교에 유효적절 하게 사용할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실상은 종교개혁 이후 1700년초까지 개신교는 세계선교의 주도권을 로마 카톨릭에 완전히 내어준 채 세계선교의 관심과 노력을 전혀 갖지 못하였었다. 반면에 로마 카톨릭은 그 기간 중 유럽에서 개신교에 잃은 인원보다 더욱 많은 수의 개종자들을 식민지를 통하여 얻었으니 개신교 교회들로 하여금 세계선교의 영역에서 자그만치 약 2세기 동안을 잠자게끔 한 요소가 무엇이겠는가? 우리는 다음과 같은 요인들을 살펴 볼 수 있다,

가. 연약한 개신교 교회들의 상황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의 당면과제는 ‘생존’의 문제였다. 로마 카톨릭의 반개혁운동과 종교재판을 통한 신교탄압운동의 영향으로 인하여 세계선교의 비전을 가질만한 여유가 없었다는 개신교 초기의 상황은 어느 정도 이해할 만하다고 본다.

나. 개신교 내의 교리적 분열

로마 카톨릭 군사동맹에 대비하여 신교의 영주들도 신교동맹군을 결성하고 신교도 간의 성례권에 관한 이견조정을 위하여 1529년 말부르그(Malburg)에서 루터파와 스위스의 개혁파 신학자들의 회의가 열렸으나 15개 조항의 토의에서 14개 조항까지는 합의했으나 15번째 조항 곧 성찬의 그리스도 임재관에 대한 견해 조절에 실패함으로 회의가 결렬되어 이후 교회의 예배의식, 강단장식, 교회와 국가와의 관계 등에 관한 이견으로 번지는 가운데 서로 협력체제를 갖추지 못한 것이 선교에 대한 바른 관심을 갖지 못하게 된 하나의 원인이라고 본다.

다. 개신교 국가들의 식민지 정책의 낙후성

종교개혁 이후 약 100년간 세계무역을 독점하다시피 한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로마 카톨릭 국가로서 양국의 국왕들은 그들의 배가 가는 곳마다 상인들과 함께 선교사들을 함께 보내어 식민지의 기독교화에 지대한 관심과 지원을 기울인 반면 후에 신교국가인 화란과 영국은 무역에만 관심을 기울였고 그들의 배에 동승한 목사는 자국민들을 위한 Chaplin이었지 선교에 대한 관심은 전혀 없었을 뿐더러 선교사를 수송하거나 선교지에 선교사를 살게끔 허락지도 않았다.

라. 개신교 선교기관의 부재

로마 카톨릭 진영에서는 이미 존재하던 프랜시스 및 도미니크 수도단 등의 수도단들이 자체 개혁을 통하여 선교에 더욱 치중하게 되고 더우기 새로이 1540년에는 파리에서 익나티우스 로욜라에 의해서 “예수회”가 설립되어 군대조직적 체제와 규율을 가지고 엄격한 훈련과 상관에 대한 철저한 복종과 독신생활과 가난한 삶을 다짐한 수도사들을 통하여 선교지를 널리 확장해 나가는 반면에 개신교에서는 1700년 초기에 겨우 그나마 선교에 관심을 갖고 움직인 가장 큰 개신교의 그룹이 “모라비안”들이었다. 더우기 그들의 대부분은 문맹의 지식보다는 열정이 더욱 많은 자들이었고 수공업자들과 가난한 농부들이었고 결혼하여 생계를 유지하며 가정을 꾸려가야만 하는 훈련받지 못한 자들로서 카톨릭의 “예수회” 수도원들에 도저히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의 선교사들이었다.

마. 신학적 논쟁을 통한 교회의 영적 침체현상

첫번째로 선교의 일을 개신교 내에서 시도한 이는 오스트리아의 루터교인이었던 Baron Justinian von Weltz로서 그는 1664년에 「교회의 선교척 책임」이라는 팜플렛을 통해 교회들이 선교기관을 설립하여 선교사 후보생들을 훈련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 당시의 교회들은 신학의 정통성에도 불구하고 영적 열정과 선교적 비견이 결여되었기에 Baron을 가르켜 이상가요 광신자요 이단이라고 지탄하며 “하나님의 거룩한 것을 개들이나 돼지들에게 던지지 말라!”고 비웃었던 것이다. 당시의 개신교회가 신학적 정통성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동안 지나친 교리적 논쟁은 개신교의 교회적 분열현상으로 번지고 그들의 신앙은 날로 차가워지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세계선교는 관심 밖의 대상일 뿐이었다.

바. 종교 개혁자들의 그릇된 신학 (교회관)

개신교가 세계선교에 부진했었던 이제껏 열거한 여러가지의 요소들보다 더욱 큰 비중을 차지하는 요소는 바로 그룻된 신학에 있다고 본다. 개신교가 처했던 환경적 여건이나 정치적 상황은 어느덧 극복되어진 요소가 되나 개신교가 선교에 관심도 기울이지 않은 가장 근본적 요소는 「신학」의 문제이다. 종교개혁자들은  「지상사명」이 단지 사도들에게만 부여된 사명이며 그들은 그 당시에 알려졌던 「땅끝」까지 복음을 가지고 나가 전했기에 그 주님의 명령은 수행되었고 그 이후의 세대들이 복음을 갖지 못했다면 그것은 그들 자신의 잘못이며, 그들의 불신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기에 교회는 그들에 대한 권세도 없고 선교사를 파송할 책임도 없다’고 가르쳤기에 그 이후의 교회는 선교의 필요성을 계속적으로 부정해 오게 된 것이다. 또한 마틴 루터는 그의 교회관에 있어서 참 교회의 표징으로 “말씀의 효과적 선포”와 “성례의 집례”와 “목회 심방 및 권징”을 말하고 있으나 선교의 필요성은 부정했었다. 이와같은 개혁자들의 선교에 대한 비전의 결여와 신학의 부채가 이후 약 2세기간의 개신교의 선교부재 현상을 초래한 사실을 살펴볼 때 참으로 바른 신학의 정립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새삼 절감하지 않을 수 없다.
 

3) 현대 개신교 선교시대 (18세기 이후)

현대 개신교 선교운동은 1648년 Westphalia 평화조약으로 종결된 ‘30년 전쟁’ 이후 독일에서 시작된 「경건주의 운동」의 직접적인 산물로서 시작되었다. 마치 개신교의 종교개혁이 로마 카톨릭의 왜곡된 교리와 도덕적 타락에 대한 개혁운동이었던 것과 같이 경건주의운동 또한 유럽 개신교의 국가교회(state churches)의 메마른 정통주의와 생명력을 상실한 영적침체 현상에 대한 개혁운동이었다. 종교개혁을 교리적 개혁운동이라고 본다면 경건주의운동은 신앙의 생활화 운동이라고 볼 것이다.

이 운동의 주도자는 스펜너(Philip Jacob Spener, 1635-1705)였다. 루터교 목사로서 그는 푸랑크푸르트에서 19년간 성공적인 목회를 하면서 독일의 경건주의운동을 전개하였다. 경건주의자들의 가르침을 세가지로 요약하자면 : 첫째로 참된 회개의 경험과 인격적 신앙의 강조; 둘째로 성경공부, 기도생활, 진정한 교제를 통한 내면생활의 개발; 셋째로 선교적 열정을 강조하였다. 그들에게 있어서 참 종교는 ‘마음’의 문제이지 ‘지식’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므로 ‘영적인 삶’의 개발이 가장 중요한 관심사였던 것이다.

그 이전의 많은 개혁자들이 겪었듯이 스펜너 또한 당시의 정치 및 종교지도자들에게 극심한 반발과 박해를 받았으나 그중에서도 경건주의운동의 열매는 독일의 여러 교회들 내에서 맺혀져 가고 있었다. 마침내 독일의 쌕소니(Saxony)의 대학들이 경건주의자들을 받아들이지 않자 그들은 1694년에 그들 자신의 대학을 할레(Halle)에 설립하였다.

10년간 할레대학을 키운 스펜너의 뒤를 이은 지도자는 프랑케(August Francke, 1663-1727)였다. 프랑케의 영향으로 할레대학은 18세기 경건주의운동의 교육과 세계선교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가. Danish-Halle Mission (첫번째 개신교 선교기관)

경건주의운동의 온상이 할레대학을 통하여 첫번째 개신교 선교기관이 설립되었다. 덴마크의 프레드릭 4세는 1705년 코펜하겐의 궁정목사였던 프란츠 륏트겐(Dr. Franz Lutkens) 목사에게 동인도 지역에 파송할 선교사들을 모집할 것을 지시하였는데 자국에서 선교사 후보생들을 모집하는데 실패한 그는 독일의 스펜너와 프랑케에서 선교사들을 지원할 것을 부탁하여 할레대학 출신들로서 프랑케의 제자들인 지겐발그(Bartholomew Ziegenbalg)와 플윗샤우(Heinrich Plutschau) 두 사람을 윌리엄 캐리(William Carey) 보다 약 100년 전 인도에 선교사로 파송하게 된 것이다.

계속하여 할레는 프랑케의 주도하에 세계선교의 센터가 되어갔다. 이러한 선교사업은 독일교회에 생명을 불어넣어 주었고 죽은 정통의 껍질을 벗고 살아있는 교회로 탈바꿈하는데 큰 활력소가 되게 했다. 할레대학이 창설된 지 반세기도 못되어 약 6,000명 이상의 목사를 배출하여 독일 뿐 아니라 세계 각국에 일꾼을 보냈다.

나. 모라비안 선교단

1467년 핍박을 당하던 존 허스(John Huss)의 추종자들은 형제단(United Brethren)을 형성하고 지냈는데 종교개혁 이후 로마 카톨릭의 탄압으로 1722년 Saxony로 피난 와서 진젤돌프가 제공한 대지에 거하게 되었다. 당시 300명이 넘는 그들은 피난민촌을 만들어 ‘주님의 망대’라 이름을 짓고 진젤돌프를 지도자로 모시고 초대교회와 같은 공동사회를 이룩하였다. 진젤돌프(Ludwig von Zinzendorf, 1700-1760)는 할레의 산물과도 같은 자로서 10세에 할레신학교에 들어가 프랑케에게 교육을 받았다. 프랑케의 영향으로 신앙관이 확립되고 해외선교에 관심을 갖게 된 그는 가족들의 반대 때문에 신학을 더 공부하지 못하고 법률을 공부하였으나 후에 1734년에 루터파의 목사로서 안수를 받았고 18세기 개신교에 있어서 프랑케와 함께 세계선교의 지도자의 역할을 감당하였다. 1732년부터 1760년까지 226명의 모라비안들이 10개국에 선교사로 들어가 사역하였고 1930년까지는 3,000명 가량의 선교사를 파송함으로서 그들은 성찬교인 12명 중 1명꼴로 선교사를 파송해 온 놀라운 선교적 열성을 유지해온 그룹이다. 그들의 이러한 선교적 열매는 처음부터 세계선교가 기독교회에 부여된 가장 중대한 과업이라는 사실을 철저히 인식하고 선교는 어떤 특정한 자들만의 과업이 아니라 기독공동체 및 개개인 모두의 과제임을 주지시켜온 결과임을 생각할 때 그들의 선교신학은 종교개혁자들의 선교신학보다 더욱 뛰어났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닐 줄 안다.

진젠돌프가 이끈 모라비안파는 수적으로 아주 극소수였다 할지라도 그들이 남긴 영적유산은 과소평가할 수 없다. 존 웨슬레를 비롯하여 세계의 많은 전도자들이 이들의 열심과 선교비전에서 영감을 받아 헌신을 다짐했다.

다. 윌리엄 케리 (William Carey, 1761-1834)

마틴 루터를 종교개혁의 아버지라고 부른다면 윌리엄 케리는 현대 세계선교운동의 아버지라고 불리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마치 종교개혁의 준비가 이미 이루어진 때에 마틴 루터가 등장한 것과 같이 역사를 주관하시고 주권적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윌리엄 케리의 등장으로 세계선교의 큰 장이 열리기 전에 이미 세계선교운동의 개진을 위한 준비는 이루어지고 있었다.

스팀 기관선의 개발로 대양을 통한 동서간의 활발한 해상교통의 발전과 아울러 진행된 식민지화, 또한 유럽의 경건주의운동과 영국과 미국의 복음주의 대각성운동 등의 영적쇄신운동이 그리스도의 교회로 말미암아 세계선교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준비작업을 치루어 왔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1723년 스코틀랜드의 로버트 밀러는 미개인들을 개종시키기 위한 기본적 수단으로서의 중보기도를 주장하고 이후 약 20년 후에는 영국 전역에 식민지의 미개인들을 위한 기도그룹이 생기게 되었다. 1747년에는 조나단 에드워드가 모든 신자들로 하여금 복음이 세계 땅끝까지 전파되어 나갈 것을 위하여 기도해 줄 것을 요청하여 세계복음화를 위한 기도운동이 점차적으로 확산되어 가는 가운데 윌리엄 케리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구두 수선공이었던 그는 제임스 쿡(James Cook)의 항해기 「The Last Voyage of Captain Cook」을 읽고 선교에 관심을 갖게 되고 1972년 8페이지의 소책자를(An Enquiry into the Obligations of Christians to Use Means for the Conversion of the Heatheans) 통해 크리스천은 그 소유를 바쳐 이방인을 회개시킬 책임이 있다고 역설하고 그 해 10월 이 이사야서 54:2-3절 설교로 침례교 외국 선교회를 (The Particu1ar Baptist Society for Propagating the Gospel among the Heathen) 조직하였다.

극심한 어려움 가운데에서도 그는 못마땅해하는 아내와 내 자녀들, 그리고 두 명의 동행인과 함께 5개월의 긴 항해 끝에 인도에 도착한 윌리엄 케리는 그후 40년간을 활발한 선교사업을 추진해 나갔다. 그의 영향으로 수 많은 선교기관이 생기게 되고 이 기관들은 19세기 세계선교에 지대한 공헌을 하게 되었다.

라. 19세기 선교운동

19세기에 들어 세계선교운동은 활짝 피어 오르게 되었다. 수많은 선교기관들이 생겨나게 되었고 조직화 되고 전문화된 선교운동이 바야흐로 전개된 것이다. 이에 따라 여러 종류의 선교기관의 형태를 보게 되는데 첫째는. 초교파 선교기관의 등장인데 그중에는 The London Missionary Society와 The American Board of Commissioners for Foreign Missions 등이 있고; 둘째는, 교단별 선교기관이 있고; 세번째로. 19세기 중엽에 생겨난 ‘믿음선교기관’(the faith mission)이 있는데 그중에는 The China Inland Mission(현 OMF)가 있다. 19세기 말까지 영국에만도 25개 이상의 이런 유형의 믿음선교기관이 생기게 되었다. 내번째로는 특별선교기관이 있는데 어떤 특정한 부류의 사람들을 위한 선교기관이다. 예를 들자면, 유태인. 인디안. 에스키모, 소경, 장님. 군인, 고아, 문둥병자 등이다. 또는 특정한 사역을 위해서 생긴 기관으로: 문맹자, 문서선교, 라디오, 항공, 구제 등이다. 이들 중에는 보내는 선교기관과 단순히 지원하는 단체들이 있다.

또한 특이할 만한 사항은 성경번역 단체들과 성서공회들의 등장이다. 이 단체들은 성경번역과 보급에 큰 역할을 감당하여 이들 단체들의 출현이 없었다면 세계선교는 큰 어려움을 면치 못하였으리라.

활발한 선교사역의 결과로 세계 각 지역에는 학교. 병원, 고아원, 의료대학 등의 사회복지기관들이 세워지게 되고 그리스도의 복음이 각 개인의 영혼구원과 사회의 변화를 초래하게 되었다. 기독교 뿐 아니라 세계 다른 어느 종교에서도 한 세기라는 짧은 시간에 이토록 놀라운 성과를 거둔 일은 이미 일찌기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 19세기를 통한 세계선교의 성공을 말해 주고 있다.

마. 20세기의 선교운동

금세기의 도래와 함께 세계선교의 큰 영향을 끼친 세가지 운동이 있었으니 이는 곧 :
첫째로, 믿음선교운동이요 (The Faith Mission Movement),
둘째로, 성경학교운동이요 (The Bible Institute Movement),
셋째로. 학생자원운동이다 (The Student Volunteer Movement). 

이 세가지 운동은 모두 북미 대륙에서 일어난 운동으로서 처음 두가지 운동은 지금껏 지속되고 있으나 세번째 운동은 1930년대에 꽃을 피웠던 운동이다.

첫째로, 믿음선교운동은(The Faith Mission Movement) 소속된 선교사가 보장된 재정적 지원이 없는 채 기독교 공동체에 그들의 필요를 알리고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의 마음을 움직이사 선교의 후원자를 보내주실 것을 믿음으로 사역을 추진하는 선교운동으로써 위클리프 성경번역 단체와 대학생선교회 (CCC)등의 수많은 선교단체들이 이러한 방식으로 놀랍게 그들의 사역을 감당해오고 있는 실정이다.

둘째로. 생경학교운동은(The Bible Institute Movement) 이미 1880년대부터 특히 북미주들 중심으로 얼어난 현상으로 이는 자유주의의 물결이 북미 신학교를 휩쓸고 있는 무렵에 이에 대항한 복음주의운동의 결실로 나타난 운동이다. 이들 성경학교들은 시작부터 선교와 전도의 중요성올 강조해 현재까지 약 500개 이상의 성경학교와 신학교들이 북미주에 산재하여 믿음선교기관을 통한 선교사들을 배출해오고 있다. 예를 들자면 Moody Bible Institute 1890년 개교이래 지금까지 약 6천여명의 선교사들을 배출해오고 있고 현재에도 약2천 5백명 이상의 현역 선교사들이 이 학교 출신임을 볼 때 실로 생경학교운동이 현대선교에 끼친 공헌을 과소평가할 수 없는 실정이다.

셋째로, 학생자원운동은(The Student Volunteer Movement), 1880년대에 시작된 운동으로 프린스톤대학의 졸업생이었던 Robert P. Wilder의 선교적 비전과 당시의 위대한 부흥사였던 D.L. Moody의 영적인 능력과 당시 Cornell 대학의 학생이었던 John R. Mott의 천재적 조직력에 힘입어 운동으로서 1886년 여름에 Massachusetts주의 헐몬산에서 100여명의 대학생 및 신학생들이 무디의 집회에서 선교사로 지원할 것을 서약한 ‘프린스톤 서약사건’으로부터 시작되어 이후 전 미국의 대학들에 파급된 학생들의 자원적 헌신운동이었는데 그들의 슬로건은 “이 세대에 전세계를 복음화 하자!"였다.

이러한 대학생들을 중심한 헌신운동의 결과로 약 50여년에 걸쳐 2만명이 넘는 선교사가 북미주를 통하여 배출되었다.

제1, 2차 세계대전을 통한 공산주의, 사회주의의 도래로 세계 여러 나라에서의 선교가 중단되었으나 복음방송을 통한 방송선교와 여러 기관들의 문서선교는 끊임없이 진행되어 오고 있다.
 

2. 헌재의 상황분석

우리는 지금 놀랍도록 급변하는 세계정세 가운데에 살고 있다.

발전하고 있는 과학문명, 교통, 통신, 산업, 교육, 의학 등의 변화는 일찌기 상상을 불허할 정도이다. 더욱이 최근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세계의 정치적 변화는 세계선교에도 놀라운 변화를 주게 될 것이다. 소련에서의 공산주의의 몰락은 종교의 완전한 자유를 보장하게 되었으나 기독교 뿐 아니라 각 타종교들과 특별히 이단종파의 개입으로 활짝 열린 종교자유화 물결을 타고 우리의 선교지가 잠식되어 가고 있는 실정임을 고려해 볼 때 선교적 각축전이 예상되고 있다.

사도 바울은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마게도냐의 「환상」을 보았으나 현재 우리는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동구권에서의 「실상」을 보고 또한 듣고 있다.

작년만 하더라도 소련 침례교연맹의 지도자들이 한국 및 재미 한국교회에 선교적 지원을 호소해 온 사실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으며 유럽의 가장 오래된 헝가리의 개혁신학교의 감격스러운 개교를 위한 한국교회의 지원을 살펴볼 때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제껏 축복하신 한국교회를 통한 이 시대의 선교적 사명을 겸손히 그리고 또한 지혜롭고 자만하지 않으면서 아직도 세계선교사의 압도적 다수를 파송하며 막대한 선교비를 부담해 오고 있는 전통적 선교의 주도국이었던 영미와의 긴밀한 협조를 통해 세계선교(Global Evangelization)의 사명을 성실히 감당해 나가야 할 것이다.

세계선교는 어느 일개국 만의 독점물이 아니고 인종과 국가를 초월한 그리스도의 몸된 ‘지상교회’의 가장 중요한 사업이기에 교파 및 인종과 국가를 초월한 긴밀한 협조체제의 이룩을 위해서 한국교회도 부단히 노력해야 할 것이다.
 

3. 2000년대 세계선교를 위한 방향제시

1) Development of the proper “Theology of Missions” - 바른 ‘선교신학’의 확립이 가장 중요한 과제이다. 우리는 역사의 교훈을 배워야 한다. 개혁자들의 그릇된 교회관이 (선교를 참된 교회의 표증으로 보지 않은 점) 2세기 동안의 선교침체 현상을 초래한 점과 모라비안파의 선교의식이 그토록 크고 자연스러운 선교에의 헌신을 불러 일으킨 것을 볼 때 바른 신학은 바른 선교사역을 위한 초석과도 같음을 알 수 있다.

2) 바른 신학에 바탕을 둔 교회 내의 끊임없는 갱신운동이 말씀과 기도를 통하여 일어남과 아울러 그 영향이 선교운동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교회의 질적성장은 선교운동의 원동력이기에 전 교인들을 선교에 직접, 간접으로 참여시켜야 한다. (Pastors should train all Christians to be mission minded.)

3) 초교파적 선교기구의 발족과 운영을 통하여 선교사업을 지원한다. - 군소단위의 선교의 영세성을 탈피하고 대규모의 선교기관 설립이 절실히 요구된다. 이 일이 가능하기 위해선 재정 및 인력의 공동지원이 필요하다.

4) 이민 1.5세 및 2,3세들에게 동기를 부여하고 즐거운 헌신을 권면하여 그들 중 세계선교를 담당할 선교후보생들을 발굴, 훈련, 파송 및 지원하여야 한다.

5) 전략선교의 구체적 모색 – 세계적으로 서양인 선교사들을 배척하고 있는 현상이 벌어지고 제3세계권 선교사들을 더욱 환영하는 경향이 있으나 헌신되고 훈련된 자국민의 노력을 통한 성과와 비교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피선교지의 원주민(natives) 중 선발된 일군들을 불러와 그들을 훈련하고 양성하여 본국으로 재파송할 때 선교의 효과는 그야말로 가중될 것이다. 한국의 아세아연합신학원(ACTS)과 미국의 국제신학교(ITS)와 같은 사역이 더욱 활발히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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