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의
신학대학에서 아랍 학생들을 가르친 경험과 아랍교회
개척에 구체적인 사례들을 통해서 오늘의 아랍교회
현실과 중동의 신학교육의 미래를 조망하여 본다.
I. 정부의
대학인가를 받아야
아랍권에는 이집트와 수단, 그리고
레바논과 요르단에 신학교가 있다. 그런데 이들 중동의
신학교들은 해당 정부의 교육부로부터 허가를 못 받은
신학교가 대부분이다. 그러다 보니 아랍 사회에서 좀더
다양한 계층에서 일할 수 있는 아랍 기독교 인재들을
길러내지 못하였다. 중동에서 신학교를 세운다면 해당
국가의 정부인가를 받은 대학이면 더욱 좋다. 그것은
대부분 중동의 신학교가 해당 정부에서 졸업 학위를
인정해 주지 않기 때문에 사회 진출에 보탬이 안 된다.
물론 신학교에서 받은 신학사 학위로는 이슬람 사회에서
일하기 쉽지 않다. 그래서 단순히 신학 과정만이 아니라
컴퓨터 관련학과, 간호학과 등 현지인들의 사회 진출에
도움에 되는 과정들도 설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하
아랍 그리스도인들이 이슬람 사회에
영향력을 끼치고 살아야 하는데 그렇게 되려면 아랍
이슬람 사회의 지도층에 아랍기독교인들을 대거 진출시켜야
한다. 요르단의 경우 한 두명의기독교인들이 정보부와
초등학교 교장으로 일하고 있지만, 이슬람 사회에는
기독교인들이 극히 일부만 진출해 있다. 이라크가 전쟁
전후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호주와 미국으로 떠나버려
지금 이라크에는 기독교인들의 인재난을 겪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거시적으로 중동 선교 현장을 바라볼
때 아랍 기독교인들의 사회적 경제적 활동을 위해서
그리고 기독교인들이 이슬람 사회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한국교회가 과학 기술대학 등을 중동에 세우는
것도 고려해 볼만하다. 아랍인들 중 어느 가문은 자녀들이
크면 엔지니어나 변호사가 되기를 바란다. 레바논의
어느 학교를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기독교인 교장이
운영하는데 그 학교가 좋으니까 무슬림들이 입학 때
기독교 교육을 받는 것에 반대하지 않는다고 서약하고
자녀들을 보냈다.
중동의 A 신학교의 경우, 신학생들이
소정의 과정을 마치고 목회나 사역을 버리는 예가 있었다.
요르단의 아랍인들은 해당 교단의 목회자가 되면 매달
150디나르(200불) 정도를 교단에서 지원 받는다. 그러다
보니 전임 사역자가 많지 않다. 주중에는 목회 이외의
다른 일을 하는 교역자가 많다. 그러므로 아랍 교회가
리더들을 교회 내에서 훈련시키기는 쉽지 않다. 이런
악순환은 자꾸 반복되고 있다. 아랍교회는 주일에 한번의
예배와 주중에 교회학교 한번 그리고 일부 교회는 청년부와
여성반 등이 주중에 모인다. 결국 교회에서 청년들이
훈련받을 수 있는 기회는 많지 않다.
레바논은 3개의 신학교(MBC, CAIT,
ABTS) 학생들이 20-40명밖에 되지 않다(공일주, 중동의
기독교와 이슬람 참조). 수단과 레바논의 일부 신학교에서는
무슬림들이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신학교에서 공부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중동의 신학교는 과거 가톨릭이나
정교회에 다니던 학생들도 입학하기도 하나, 대부분
학생들은 복음주의 교회의 청년들이다. 중동의 A 신학교는
신학생들의 학비와 생활비를 보조하였다. 그러다 보니
기도와 말씀에 의지하여 목회를 하려고 하기보다는
다시 말해서 믿음으로 기도로 살기보다는 남에게 의지하는
교역자를 양산하는 위험성을 안고 있다. 그러므로 중동에서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기로 헌신한 일꾼들을 잘 선별하여야
한다. 게다가 만일 이라크에 일부 한국 교회가 신학교육에
참여하기를 원한다면 이미 시작된 이라크 복음주의
신학교에 동참하는 것이 학생-교수 확보와 교회 재정의
효율적인 사용 등 여러 면에서 유익하다고 하겠다.
II. 선교
지향의 신학교이어야 그러나 지혜를 가지고
중동의 신학교에서는 선교학 과목을
많이 가르치지 못했다. 그동안 선교과목을 가르치기는
했어도 충분하지는 못하였다. 그래서 이슬람국가 내의
중동의 일부 신학교들은 교괴목을 <이슬람권 선교학>라는
말을 쓰는 대신에 <교회 성장>등으로 과목이름을
변경하여 사용한다. 아랍 기독교인들은 어려서부터
이슬람을 일부러 배우지 않아 이슬람에 대해 잘 모른다.
아랍기독교인으로 태어난 자녀들은 기독교 학교를 다녔고
혹은 이슬람학교에 입학하였더라도 이슬람 종교 시간에는
이슬람을 안 배우고 다른 자습을 하기도 하므로 아랍
기독교인들이 이슬람에 대하여 잘 모른다. 아랍 기독교인들이
아는 이슬람의 지식은 이슬람을 이해하기에는 불충분하다.
중동의 신학교에서 이슬람을 가르칠 만한 아랍인 교수가
거의 없다. 오히려 외국 선교사들이 이슬람에 대한
연구를 한다.
아랍 기독교인들은 무슬림들 속에
살면서도 그들 이웃으로 사는 무슬림들에 대한 관심보다는
오히려 이슬람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평생에 한번도
이슬람 사람들에게 복음을 제시해 보지 못하고 사는
아랍 기독교인들이 많다. 그들의 이런 두려움 이외에도
아랍 기독교인들 중에 명목상의 기독교인들이 많아
실제로 자신의 신앙을 무슬림들에게 증거하는 아랍인은
극소수이다. 그들은 평생 무슬림들에게 어떻게 복음을
제시할 지 생각해 보지 않았다. 아랍 가톨릭 교인과
정교회 교인들은 아랍어 성경을 읽지 않는 교우들이
많다. 그래서 이들은 이슬람의 꾸란 내용을 성경의
내용과 혼동하기도 하고 이슬람의 관습을 기독교인의
관습으로 착각하기도 한다. 아랍기독교인들은 표준
격식체 아랍어(푸스하)로 글을 쓰는데 있어서도 아랍
무슬림들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약하다. 아랍 기독교
학생들에게 소논문을 써오라고 과제를 내주면 그 과제에
어법에 틀리지 않는 학생이 거의 없으나 무슬림 학생들은
상당수 어법에 맞게 써온다. 심지어 어느 아랍의 신학교
교수도 아랍어로 논문을 썼는데 표준 어법에 맞지 않는
말이 많았다. 아랍 기독교인 중에서 표준 격식체 아랍어를
잘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을 찾기가 어렵다.
III. 초교파
신학교도 있어야
중동에 있는 신학교들은 각기 저마다
특징을 갖고 있다. 이를테면, 중동의 A 신학교(학감은
미국인)는 초교파 신학교로 시작은 하였으나 지금은
침례 교단 일색으로 바뀌었다. 레바논의 아랍침례 신학교(학감은
미국인)는 침례 교단에서 운영하고 있고, 이집트의
카이로 복음주의 신학교는 장로교단의 신학교로서 다양한
교단의 학생들을 받아들이고 있다. 레바논의 근동 신학교는
장로교, 아르메니아 복음주의, 성공회, 루터교가 연합하여
운영하고 있다. 수단의 신학교들은 영세성을 면치 못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새로 시작하는 복음주의 신학교가
초교파(Inter -denomination) 신학교로서 그 중심을
잃지 않는다면 한국교회가 중동에 신학교를 세우는
데 큰 의미가 있을 것이다. 적어도 초교파 신학교가
되려면 교과과정 편성 그리고 학생들과 교수 모집을
교단별로 확보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중동의 신학교 교수 교원은 중동의
복음주의 신학교에서 훈련받게 하여 장차 교수요원으로
확보하여 나가는데 가장 좋다. 교수요원은 전공 분야
이외에 반드시 교수법과 컴퓨터 등 시청각 기자재 활용법도
이수하게 한다. 이라크 복음주의 신학교의 경우, 이라크
뿐만 아니라 주변 걸프지역에도 파급 효과가 커서 한국교회에
가져다 주는 선교적 효과는 매우 클 것이다.
IV. 중동
선교를 위한 한국 교회의 연합과 협력
걸프지역 6개국(사우디, 오만,
아랍 에미레이트, 바레인, 카타르, 쿠웨이트)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할 영적 리더를 양성하는 것이다. 필자가
아랍에미레이트에서 몇 명의 아랍 기독교인들을 만났다.
그들은 자신들이 수업 받을 장소와 학생들을 준비시켜
둘테니 가르칠 신학교 교수를 보내달라고 하였다. 또,
중동의 한국 선교사들을 위한 <이슬람권 선교>
와 <아랍교회 현황과 목회 실제 및 아랍어
성경 주해>에 대한 강의가 이뤄지면 한국인 선교사들의
안식년 연수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이슬람권 선교에
대한 연찬은 계속되어야 한다.
이슬람이 시시각각 달라져
가는 것도 있어 이슬람의 최근 동향뿐만 아니라 이슬람
사람들의 세계관과 기독교관 그리고 성경관을 알아야
선교에 유익하다. 더구나 매년 아랍교회의 목회자 수급
상황과 현지의 사역에 한국교회가 어떻게 그 필요를
채울 수 있을까에 대한 협력이 논의되고 아랍인들에게
맞는 성경 주해 그리고 성경 해석학을 배워보는 것이
아랍인들의 의식 구조도 알고 선교적 접근 방안을 세우는데도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이슬람은 선교 지향의 종교이고
종말 지향의 종교이며 율법의 종교이다. 무슬림은 인간이
태어난 목적이 무슬림으로 자라 이 세상을 이슬람화
하는데 있다고 가르친다.
그동안 한국인 선교사들이
좀더 폭넓게 중동 현지 교회와 기독교 기관과 연합하여
일할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하였다. 한국인 선교사들이
독자적으로 사역하는 일은 있었지만, 물론 아랍 기독교인들의
배타적인 태도에도 기인하지만 한국교회가 좀더 폭넓은
영역에서 사역의 동반자로 일할 수 있도록 중동에 선교의
교두보를 확보하는 것이 필요하다. 미국 선교사들은
중동에 신학교, 유치원, 각급 학교, 언어 훈련 센터,
직업학교, 구제와 사회개발, 병원 등을 세워 자국의
선교사들이 충분히 훈련받을 여건을 갖추었다. 그러나
한국 선교사가 현지인들과 활발히 교류를 넓혀가며
사역하였던 경험은 그리 많지 않았다. 심지어 일부
한국인 선교사들은 아랍 기독교인들의 리더쉽을 신뢰하지
않는 경우도 있어 선교 현장에서 신입 선교사들이 우왕좌왕하는
일도 있었다.
그런데 한국인 선교사들의
대부분이 현지 아랍교회의 목회를 도울 수 있으려면
아랍어를 알아야 하는데 한국의 일부 신학대학교에서
아랍어를 선택과목으로 가르치면 도움이 될 것이다.
미국의 선교사들은 중동에 파송되기 전에 아랍어를
미국 내에서 배운 선교사들이 있었다. 적어도 한국의
여러 신학대학 중 한 곳만이라도 이슬람권 선교를 위한
연구소 혹은 이슬람권 선교를 위한 과정이 설치되어
여기서 중동의 복음주의 신학교 교수진들을 양성하고
나아가서 장기적으로 중동 선교를 도울 목회자 혹은
전문인 선교사들을 배출시키는 것이다.
V. 중동의
환경과 문화에 맞는 신학교육
중동의 신학교와 아랍 교회가 연계되어
신학 프로그램을 실시하게 되면 신학생들이 매주 주일을
각 교회에서 섬기게 되거나 무슬림들의 양육 프로그램에도
참여하게 된다. 그래서 졸업 후에는 이런 재학시절의
사역 경험이 매우 중요하게 작용하게 되고 신학교는
이들 교회의 목회자에게서 추천을 받은 학생들의 입학을
받는다. 중동의 신학교는 중동 환경과 문화에 맞는
신학을 지향하여야 한다. 그러려면 중동과 아랍교회와
이슬람 신학을 잘 아는 교수들이 필요하므로 한국 교회는
앞으로 중동의 신학교에서 교수 사역할 인재들을 양성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시급하다. 중동의 신학교에서는 교수들의
수업에 대한 평가에 있어서 해당교수가 현지 문화에
맞게 교육하였나를 늘 평가하고 있다.
신학교 교수들이 학생들의 영적
멘토가 될 수 있도록 하며 현지 교회가 신학교에 적은
액수라도 매년 후원하는 것이 중요하다. 실제로 중동의
신학교들이 그 재정을 현지 아랍 교회에서 후원 받는
경우는 극히 적고 대부분 그 재정을 해외에 의존하고
있다. 가령, 요르단의 경우, 해당 지역 교회가 신학교
운영을 위해 헌금을 전혀 하지 않고 있었다. 아랍교회는
십일조를 하는 교인들이 한 교회에서 5-10명 정도이다.
가끔은 중동의 신학 교육이 이런 후원금을 주는 서구의
단체나 미국 교회의 영향권에 놓여 있기도 하였다.
중동에 살다 보니 한국의 이슬람
학자들이 말하는 이슬람의 실상이 현장과 다른 게 많았다.
중동에서 무슬림들을 만나면서 이들 무슬림들의 시각과
상황에 맞게 성경을 제시하는 것이 필요하다. 한국의
목회현장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권에 있는 청소년들에게
어떻게 복음을 전할까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목회자들이
이에 대한 적절한 답을 찾아 목회를 하고 있다. 그런데
아랍 사회는 아직도 대부분이 모더니즘하에 있다. 더구나
이슬람 문화는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을 받아들이는
것이 이슬람 문화가 퇴보되는 것으로 간주한다. 이것은
이슬람의 전통적 해석에 의문을 제기하게 하기 때문이다.
아랍 무슬림들에게 복음을 나누려
할 때 그들이 생각하게 하는 질문 혹은 그들이 발문하게
하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 매우 유익하다. 중동에서
아랍과 이스라엘 간의 문제는 매우 민감한 주제다.
특히 아랍교회에서도 구약을 제시할 때는 이스라엘이라는
단어보다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단어를 선호하는 것도
그 이유 중 하나 이다. 그렇다면 무슬림과 복음을 나눌
때 21세기 중동 현장에 맞는 새로운 성경 읽기가 필요하다.
적어도 오늘날 아랍인들이 잘 사용하지 않는 아랍어
성경의 어휘들을 이슬람 사람들이 이해하기 쉬운 다른
어휘로 바꾸어 설명하는 것이 무슬림들에게 더 잘 전달되기도
한다. 그래서 기독교인 아랍 학자들은 신구약을 무슬림들에게
제시하는데 적합하게 성경 번역을 다시 하였는데 앞으로
이런 성경 번역에 대한 연구도 계속되어야 한다. 아랍
교회와 무슬림들에게 직접적인 사역을 하지 않으면
아랍과 이슬람의 내막을 알기 어렵다. 성경과 코란에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나오지만 아브라함의 삶이 각기
다른 의미로 해석되고 있기 때문에 단어 한 두개 바뀌었다고
하여 성경을 쉽게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었다. 성경을
읽어보라고 성경을 준 후에 무슬림은 읽고 나서 이건
토라(구약)와 인질(신약)이라고 금방 알아봤다. 이슬람에서는
구약과 신약을 안 믿는다.
무엇보다도 한국 교회가 이제는
이슬람권에서 전통적인 모델 즉 교단과 신학교를 통해서
선교사를 파송하는 것은 물론 각 영역의 전문인
선교사들이 더 많이 헌신되고 파송될 수 있도록 교단과
교회가 이들 평신도 전문인 선교사들을 적극 지원하는
선교 정책으로 바뀌어야 한다. 아직도 정규 신학대학교를
졸업하고 교단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선교사를 선호한다면
중동에서의 선교는 아랍교회에 오지 못하는 95% 이상의
무슬림들에 대하여 적극적인 선교를 펼치지 못하는
것이다. 또, 신학교를 세우고 그 신학교를 중심으로
아랍 리더들이 양육되는 것도 필요하지만 신학교 건물이
없이 신학 연장 교육TEE이나 BEE 프로그램, 평신도
제자훈련 교재 등을 가지고 중동 각국으로 찾아가 가르치는
것도 필요하다. 그리고 지금은 한국 선교사들이 중동
여러 곳에서 가정교회를 많이 열어 가야 한다. 작은
목장들이 중동의 가족 형태에 알맞고 보안 유지에 장점이
있기 때문이다.
VI. 적용:
눅 15장 11-32를 아랍인들에게 어떻게 제시할까?
우리를 찾으시고, 기뻐하시는 하나님
눅 15장은 잃은 양의 비유(1-7),
되찾은 드라크마(8-10) 그리고 되찾은 아들(11-32)의
비유 등 세 가지 모두가 <찾으시는 하나님>에
대해 말씀해주고 있다. 23절과 31절에 잃어버렸던 아들이
찾게 되었다고 두 번 나온다. 17절 <제정신이 들어>는
돈은 탕진하고 먹을 것은 없고 그러니 아버지가 생각난
것이다. 그러나 21절에서 작은 아들은 자신이 죄를
지었다는 것을 아버지께 고백하며 자신이 아들이 될
자격이 없다고 한다. 물론 아들이 이렇게 말한다고
아들이 안 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자신의 의를
내세울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시고 부르시는 것은 우리의 공적 때문이 아니라
그의 사랑하심에서 시작된다. 24절과 32절의 <휴레세이>는
수동태이지만 관찰, 조사를 통해 지적으로 발견하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아버지는 집을 나간 작은 아들을
찾고 있었다. 20절에는 아버지가 아들을 멀리서 보니
마음이 불쌍하게 생각하여 달려가 포옹하고 입을 맞춘다.
그리고 아들에게 아무 말이 없으시다. 하인들에게 “빨리
가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오라”고 명한다. 가장 좋은
옷은 아버지의 옷이었을 것이다.
화목하게 하시는 하나님
그렇다면 이 본문에는 율법과 은혜,
죄인(동생, 율법을 어긴 자)과 평소에 아무런 큰일
안내고 사는 사람(형-율법을 지키는 자) 등을 살펴
볼 수 있다. 이방인과 탕자는 하나님의 나라의 일원이
될 수 없다고 믿은 형은 마치 바리새인들과 같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베푼 천국 잔치를 거부하고 들어오지 아니하는
사람들이다. 여기 중동에도 하나님의 천국잔치에 들어올
생각을 안 하는 무슬림들이 많다. 그런데 본문의 아버지는
하나님 즉 예수님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아버지는 두
아들을 잃었다. 하나는 탕자로 아버지의 권위를 무시하고
제멋대로 집을 나간 작은 아들이고 또 큰 아들은 아버지와
같이 살지만 아버지와 마음으로 하나되지 못한 사람이다.
25절에 집에서 춤과 음악이 들리면 바로 집을 들어가야
할텐데 그는 하인을 불러 무슨 일인지 묻는다. 아버지와
좋은 관계가 아니었음을 반증한다. 28절에서 그는 화를
낸다. 마음이 뒤틀린 모습이다. 그런데 아버지는 장자가
안 들어온다는 것을 하인들로부터 듣고 밖으로 나와
장자에게 들어가자고 한다. 29절에서 장자는 내가 수년동안
종(둘로스)으로 살았다고 아버지께 말한다. 30절에서(아랍어
성경) 장자는 <당신의 아들>이라고 하여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고 있다. 심지어 친구들과 염소새끼 한 마리
잡아서 파티한번 안해줬다고 아버지를 퍼붓고 있는데
이는 억울하다는 자신의 감정을 과장한 표현이다. 30절에서
동생이 창녀 때문에 재산을 낭비하였다고 그는 해석하고
있으나 정확하지 않다. 장자와 아버지간에 관계가 잘못되어
있다. 아버지는 그를 아들로 알고 있는데 그는 종으로
알고 있다. 두 아들은 아버지가 잃어버린 아들들이었다.
그러나 탕자는 아버지께 돌아왔으나 이 이야기의 끝에는
장자의 답변이 없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29절에서 큰 아들은 자기의 행함으로
그리고 자신의 업적으로 아버지와 관계를 맺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가 시작된 것은 우리의
공적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찾아오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사랑한 동기가 아니라 상을 바라고 아버지의
일을 하고 있는 형이다. 오늘 우리 주위에도 알라의
상을 바라고 기도하는 무슬림들이 있다. 그런데 아버지와
아들은 한 집에 살지만 생각이 서로 다르다. 아버지는
큰 아들이 항상 아버지 집에 있고 유대법에 따라 장자에게
줄 2/3의 재산도 곧 그의 것이고 작은아들이 1/3을
탕진하고 돌아왔어도 장자의 몫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오직 아버지 집에 있는 것만으로도 기뻐할
줄 알았는데 장자는 그렇지 않았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속한 다른 지체가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쁨이
있는가? 하나님 나라의 한 부분을 차지하는 그로 인하여
기뻐하는가? 탕자가 돌아올 때 본문 30절에서는 아버지가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다고 했는데 살진 송아지는 아버지가
탕자의 돌아옴을 기뻐한다는 뜻이다. 레위기 4장에서
송아지와 염소는 속죄제에 쓰였다. 그가 죽었다가 살았다는
것은 부활의 의미가 있다.
종이 아닌 아들로 받으시는 하나님
작은 아들이 부모가 돌아가시기
전에 유산을 요구하는 것은 <아버지 빨리 돌아가십시오>라는
말과 같다. 아버지가 돌아 가시 전에 유산을 요구하는
것은 중동 문화에 안 맞는다. 아버지의 권위가 땅에
떨어졌고 이 재산을 동네 사람들에게 팔고 갔으니 아버지
체면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13절에 <제몫을 다
챙겨서>라고 하였는데 이 말은 다 팔고 갔다는 것이다.
가족의 수치다. 중동의 문화는 체면 문화이다. 작은
아들이 아버지를 떠났다는 것은 <하나님과 멀어져
갔음>을 의미한다. 그러고 보면 본문에 나오는 아버지는
중동의 가부장적 모델의 아버지가 아니다. 더구나 내
분 깃을 달라고 하는 작은 아들을 때려서 쫓아내야
할 판인데 아버지는 그의 말을 들어주어 그에게 분
깃을 허용한다. 바리새인들이 전혀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다.
또 이방인들에게 돈을 몽땅 낭비하는 것은 유대문화에서는
금지사항이다. 유대문화가 금하는 돈의 낭비와 돼지
치는 것을 했다는 것은 가족과의 단절된 작은 아들의
모습을 나타내 주고 있다. 더구나 돼지 치는 것만도
더러운데 돼지 먹이라도 먹겠다는 말은 바리새인들에게
구역질 나게 하는 장면이다. 그래서 작은 아들은 21절에서
아들이라 불릴 자격도 없다고 한다.
작은 아들이 회개하지도 않았는데
미리 동네 어귀에서부터 아버지가 나가서 기다리시고
그를 보자마자 허겁지겁 달려나간다. 중동 문화에서는
길다란 겉옷을 입고 뛰는 것은 흔하지 않다. 작은 아들은
돈을 벌어 자신의 위신을 세우고 싶어 돼지를 치려다가
그 땅에 기근으로 실패하고 아버지의 종으로 일하려고
돌아온다. 작은 아들이 변명하기도 전에 아버지는 그의
입을 맞춘다. 입을 맞춘다는 것은 그를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그리고 가장 좋은 옷을 입힌다. 이어서 반지를
끼워준다는 것은 재산 소유권을 주며 아들로 맞이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당시에 종들은 신발이 없었는데 아버지는
그에게 신발을 신겨서 그가 진짜 아들임을 선포한다.
이제 잔치는 시작되었고 아버지는 동네 유지로서 많은
손님을 맞이한다. 손님이 많으면 뭔가? 두 아들 중
장자가 잔치에 안 온다. 그것은 역시 또 아버지의 체면에
망신을 시키는 것이다. 요르단에도 아버지와 다투어
집을 나간 아들을 보면서 아버지 체면이 말이 아니라고
아파하는 그의 어머니를 만났다.
상한 마음과 고통을 참으시는 하나님
그런데 본문에는 이렇게 작은아들이
아버지의 권위와 체면 그리고 가족에게 수치를 가져다
준 일에 대하여 작은 아들이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였다는
말은 없다. 아버지의 상한 마음과 이렇게 견디어 내고
거절당한 아버지는 사랑의 고통을 안고 있다. 그 아픔을
이기시고 멀리서 아들이 오기만을 기다린다. 이런 사랑이야말로
어머니 같은 아버지의 사랑을 보게 된다. 우리에게
오늘 본문이 가르쳐 주시는 것은 우리의 체면의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깊으신 사랑을 생각하면서
또 한번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랑을 배운다. 본문에서
아버지는 예수님으로 등장하고 있었다. 대부분 우리의
삶은 15절에서 끝난다. 고립된 채 홀로 살아가게 되는
작은 아들의 모습으로 이야기는 끝났어야 헸다. 그러나
그 다음에 아버지가 등장하고 나중에는 장자의 이야기를
덧붙이고 있다. 장자는 여기서 바리새인들을 겨냥한
말씀이다. 무슬림들은 이런 바리새인과 같다. 그들이
천국의 복음잔치에 와야 한다.
무슬림에게 본문 말씀을 전하니
위 본문 말씀에는 아랍무슬림이
듣고 힘들어 할 내용은 없었다. 그래서 아랍 무슬림에게
이 말씀을 보면서 전하고 그의 생각을 물었다. 그는
요르단의 헌법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유산을
법으로 나누는 것은 가능하나 이슬람 샤리아법은 이를
금한다고 하였다. 작은아들이 돼지를 치는 것은 이슬람에서
돼지를 더럽다고 여기므로 이런 이야기는 이슬람문화에
안 맞지만 그래도 전반적으로 이 이야기는 아랍 무슬림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이야기라고 하였다. 아랍인들은 자녀가
아무리 큰 죄를 지었다고 해도 아버지는 그를 아들로
받아들인다고 말하고 자녀들은 아버지(혹은 스승)를
위해 섬겨야 한다고 하였다. 작은아들이 과거의 일을
뉘우치고 돌아온 것을 아버지가 잔치를 베풀어 기뻐하는
것은 아랍의 문화에서도 그렇다고 하였다. 다시 다른
무슬림을 만나 이번에는 위 본문을 보지 않고 길가에서
이야기체로 전하였다. 그는 매우 흥미 있어 하였다.
본문에 나오는 아버지는 작은 아들을 애타게 찾는yaftaqid
아버지라고 표현하고 작은 아들은 오늘날 아랍
어느 곳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라 했다. 장자는
시기심이 발동하여 그리 했다고 하면서 아버지의 말에
순종했어야 했다고 한다. 그리고 모든 인간은 자신이
태어난 고향masqaT al-ra’s 으로 돌아가고 싶어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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